하지만 빅토르 율리예비치는 끝내 원고를 완성하지 못했다. 어쩌면 책 얘기를 너무 많이 해서 책이 공중에 흩어져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공기 중에 떠다니는 원고의 입자가 이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의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사가 있는 집」중에서
‘선생님은 비운의 천재다. 미하는 재능이 없는 시인이고 이상주의자다. 사냐는 음악가가 되는 꿈을 못다 이룬 음악가다. 나는 밀고자가 되었다. 참 멋진 팀이군. 하긴, 나는 그저 내 일을 할 뿐이다. 나는 다만 이 모든 것이 보존되길 원할 뿐이다. 만약 과거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면, 아무도 과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끔찍한 페스트에 감염된 이 시기가 내 아카이브에 보존되는 것이다. 그럼 두려움은? 두려움은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것이다…….’
---「기사가 있는 집」중에서
《사형장으로의 초대》는 젊은 어문학도들의 손에서 손으로 전해졌다. 철의 장막에 균열이 생긴 것이었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것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문학의 모든 위계질서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랄까? 새로운 천체가 은하계에 등장했고, 연결된 모든 것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천체 전체의 메커니즘이 바로 눈앞에서 바뀌고, 문학작품의 절반이 자연 발화하여 재로 변해가는 기분이었다…….
---「커피 얼룩」중에서
비행기는 저주받은 삶의 폐허와 서로 끈적끈적하게 뒤얽힌 혼돈과 공포, 창피함과 거짓을 뒤로한 채 하늘로 상승해 열심히 서쪽으로 나아갔고, 그는 자유와 높은 고도의 공기, 그러니까 비행기 내부의 인공적인 공기를 흡입했다. 앞으로 놀랍도록 텅 빈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전에 잘못 쓴 것들을 모두 지우고 깨끗한 종이 위에 새로운 삶이 다시 쓰이기 시작할 터였다.
---「편도 여행」중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잠재적 가능성이라는 봉오리가 터지고 운명을 결정짓는 만남이 발생하며, 연락이 단절되었다가 경로가 바뀌고, 낮은 지대에 있던 삶이 고산지대로 올라가는 특별한 해 혹은 계절이 존재한다.
---「농인 악마들」중에서
그런 뒤에 그들은 미하의 집이 있는 치스토프루드니 가로수길에 와서 고모의 자매들이 가져가지 않은, 고모가 쓰던 낡은 물건들을 쓰레기장에 내다 버렸다. 그것은 누런 본드로 붙여놓은 접시들, 손잡이가 없는 낡은 냄비들, 텅 빈 립스틱 케이스, 오래된 신문, 걸레들, 낡은 옷가지, 절반만 남은 세라믹 곰, 노동절을 상징하는 깃발처럼 볼품없는 삶의 지루한 유해 같은 것들뿐이었다.
---「농인 악마들」중에서
“미하, 너 그거 알아?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과 돈을 버는 것은 다른 거야.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를 적절하게 섞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사미즈다트를 한번 살펴보자고. 이건 현상 자체만으로도 놀랍고 유례없는 일이야. 이것은 온천에서 또 다른 온천으로 전달되는 살아 숨 쉬는 에너지이고 사람들한테서 실이 나와서 거미줄 같은 것이 형성돼. 책과 잡지, 아주 옛날 시나 최근에 쓰인 시, 사미즈다트로 출간되는 정기간행물의 형태로 된 정보가 자유로이 드나드는 통로 같은 거야.”
---「밀류틴스키 공원」중에서
식사 후 대화가 시작됐다. 대화는 묘하게 어긋났고 중간중간 끊겼다. 그들은 과거와 미래, 혈통과 운명,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연결되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만든, 방금 일어난 이상한 일이라든지 천국에서 떨어진 듯한 아름다움에 대해 두서없이 대화를 나눴다…….
---「밀류틴스키 공원」중에서
“미하, 더는 이 세상에 새로운 소식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구나. 내 남편을 감옥에 넣은 사람은 그의 친형제였어. 두 사람 모두 죽었지. 우리의 행동이 좋은지 나쁜지는 중요하지 않아. 결정은 운명이 하는 거야. 어서 먹으렴.”
---「최전방에서」중에서
“미하,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려도 결국 죽을 거야. 그리고 음악과 시는 영원히 존재할 테고 말이야.”
---「최전방에서」중에서
사냐는 계속해서 바흐의 곡을 들었고 2주가 지날 즈음 병은 완전히 나았다.
마지막 전주곡과 푸가 나단조에 바흐는 이렇게 썼다.
“엔데 구트, 알레스 구트(Ende Gut, Alles Gut).” *
“좋군.”
사냐가 말했다. 그는 바흐의 말을 믿었다.
---「엔데 구트(Ende gut)」중에서
밖에는 눈도 비도 바람도 없었다.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바깥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발밑의 아스팔트, 건물 벽들, 나무줄기와 나뭇가지들, 이 모든 것에 얇은 얼음막이 덮여서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에필로그: 좋은 시절의 끝」중에서
“리자,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말이 아니야. 물론 그 누구도 베토벤과 바흐를 대신할 수는 없어.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거지. 하지만 과거의 문화는 가고 새로운 문화가 도래했어. 요즘 문화는 패치워크 같고 이것저것 인용하기를 좋아하지. 시간을 측정하는 방식도 과거와 다르고, 문화 전체가 하나의 완성된 공 같아. 과거의 문화 중 고루하지 않은 부분을 기반으로 두 번째 아방가르드가 시작된 거야. 아이러니하게도 혁신적인 것이 가장 빨리 낡더라고. 스트라빈스키, 쇼스타코비치, 심지어 아방가르드를 변형한 시닛케까지도 고전이 됐지. 시간은 순환하며 계속해서 새로운 것을 흡수해. 그렇게 기존 것과 새로운 것의 경계가 무너지지. 유한하고 이미 폭로된 현상이라는 의미에서는 문화에 더는 어떤 진보도 없기 때문에 아방가르드도 더는 설 자리가 없어지는 거야…….”
---「에필로그: 좋은 시절의 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