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란 결국 골방에서 혼자 쓰는 일. 세상에서나 혼자 외롭고 쓸쓸한 시간을 견뎌가며 언어를 쌓아올리는 일인데, 누군가 나처럼 오늘도 변함없이 외롭고 고독한 소설 쓰기를 하고 있으니 얼마나 반가웠을까. 혼자가 아니라는 안도가, 내가 하는 소설 쓰기가 영 소용없는 일이 아니라는 확신이, 동료가 선배가 후배가 아직 지치지 않고 여전히 쓰고 있다는 든든함이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 반가움에 덥석 손을 먼저 내민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알겠는 것이다.
---「김이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여섯 시간」중에서
언제나 나란 사람의 부족한 면이 작품으로 이어지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이제는 부족함 없이 강하고 세련된 사람이 되겠다는 욕심은 아예 버렸다. 못생긴 작품이어도 쓰자, 그것이 못내 순진한 열정밖에 되지 못할지언정. 어느 날은 하루에 30매씩도 썼다. 밥을 굶거나 잠을 못 자면서 썼던 소설들이 출판사에서 거절당하고, 다시 퇴고할 용기도 나지 않아 서랍에 밀어두고 모른 척했던 과거의 날들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오랜 옛날 일도 아니었다.
---「박민정, 나는 더 이상 소설을 기다리지 않는다」중에서
세상은 이미, 내가 리모컨 세 개를 갖고 첫 단편집을 쓰던 그 세상이 아니다. 내 리모컨 개수가 여덟 개로 늘어난 것처럼 세상도 문학도 그렇게 됐다. 늙는 게 뭐 어때서? 거꾸로, 세상이 자꾸 젊어지는 걸 바라보는 것을 사는 낙으로 삼으면 된다. 내가 늙는 만큼 세상은 역으로 젊어지고 새로워진다. 이십 대 때나 지금이나 내가 왜 소설을 쓰는지 똑 부러지게 말할 수 없는 것은 같지만, 그래서 늙어감에 대해 썼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변했다.
---「백민석, 늙었으면서 늙은 것을 모르고」중에서
무엇보다 소설가는 직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체성 같은 것이어서 오래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자격이 유지된다. 주기적으로 갱신해야 하거나, 만기가 있어서 재계약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다. 결정적으로 직업이 아닌 탓에 정해진 출근 시간이 없어서 따로 퇴근도 없는데, 그러니까 세간의 오해와 달리 아무것도 쓰지 않는 소설가란 진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단히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굳이 직장 생활에 비유하자면 수당도 없이 초과 근무 중인 상태와 같은 것이다.
---「임현, 공백의 소설 쓰기」중에서
그때의 나는 글쓰기를 몹시 싫어했다. 백일장 전날이면 배가 아팠고, 원고지 한 장을 채우기가 힘들어 몸부림치곤 했다. 소재에 대해 두세 줄 쓰고 나면 더는 쓸 말이 없었고 생각도 없었다. 그때는 핵심만 쓰면 되지, 많은 분량이 왜 필요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실은 모든 것을 글로 배웠지, 직접 몸으로 배운 게 없었기에 디테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그래서 쓸 말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자유로운 글쓰기보다 요약 정리를, 서술형보다 단답형을, 상상화보다 사생화 그리기를 좋아했고,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즐거워했다.
---「정소현, 쉽게 배운 글은 쉽게 글을 쓰지 못하게 한다」중에서
불가능한 문장은 없다. 아니, 그렇게 말해서는 곤란하지. 그러면 누군가 불가능한 문장은 있다, 고 할 테니까. 나는 싸울 힘이 없다. 하지만 중얼거릴 수는 있지. 내가 그렇다는데 내가 내게 해명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해서는 곤란해. 불가능한 문장은 존재하지 않지만 가능한 문장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보자. 문장의 존재 방식에 대해서. 그것은 오래된 말놀이 아닐까. 더는 웃는 자들이 없는. 오래된 농담 같은. 하지만 존중할 수밖에 없는 늙은 자들의 유머 같은.
---「정용준, 소설을 위한 낙서」중에서
나는 소설을 쓰는 내내 소설에 담길 이야기나 의미만큼이나 형식을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적절한 형식이 없다면 이야기는 구구절절 늘어놓는 한 사람의 속사정과 다를 바 없었다. 의도적으로 전통적인 서사의 규칙을 깨뜨리거나 산문적인 서술을 거부하기도 하는 것처럼 때로는 나름의 파격을 시도하고 실패하면서 내가 가진 이야기에 필요한 형식을 모색하고, 그 형식적 시도들의 필연성을 스스로 설득하기 위한 내적 논리를 세워나가는 일은 한 편의 소설을 끝까지 써내는 일 이상의 의미였다.
---「천희란, 미지는 창조되어야 한다」중에서
입구는 없다. 문은 없다. 문지기도 자물쇠도 비밀번호도 없다. 길도 없다. 위아래도 좌우도 없다. 내 머릿속에서 그 세계는 법칙도 규칙도 논리도 없이 유동하고 뒤섞이며 엉망진창으로 열려 있다. 무서울 정도로 자유롭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일단 시작하면 질문이 달라질 겁니다.
---「최진영, 입구도 문도 자물쇠도 비밀번호도 없는 시작」중에서
나는 불안하고 두려웠다. 여성으로서의 공포, 사회적 약자로서의 불안에 대해 생각했다. 불운과 불행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그러니까 나는 깊은 밤 길을 건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는 고라니의 공포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공포를 잊고 그 공포를 건너기 위해 마술과도 같은 환상을 만들어내야 했다. 아니, 환상으로 그 시간을 견뎌냈다.
---「하성란, 2014년 다이어리의 마지막 페이지」중에서
저 사람은 뭘 읽고 있을까? 해가 넘어갔고, 어둡고, 쌀쌀하다. 지금만큼은 어둠 속 독서자가 읽는 페이지에 담길 만한 무언가를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돌연한 다정함이나 숙련된 다정함과 관련된 무언가라면 좋을 것이다. 그런 거라면 일단은 쓸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쓰고 싶으니까. 그런데 저 사람은 정말 뭘 읽고 있을까?
---「한유주, 산책들」중에서
그래, 그렇게 그 소설이 B에게 왔으므로. 그리고 그 소설은 B에게 다른 가능성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B는 저 소설을 읽기 전까지 자신의 슬픔에 대해 막연함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B가 자꾸 어느 순간에 오면 스스로 침묵하는 이유에 대해서. 어떤 슬픔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너무 빨리 알게 된 것에 대해서. 잊지 않기위한 침묵. B는 이미 그것을 오랜 시간 삶 속에서 유지하고 있었다.
---「한정현, 불면증 환자의 침묵과 이름이 명명된 자동차의 세계」중에서
현대의 소설가는 생활인이다. 일반인과 같이 육아와 직장 생활을 수행하면서, 창작을 병행해야 한다. 소설은 쉽게 시작될 수 있을지언정, 끝까지 쉽게 이어질 수 없는 장르이다. 시작과 함께 기 싸움이 시작되고, 끝없이 두 갈래, 세 갈래로 갈라지는 탐색전이 치열하다. 한순간 다른 데 눈을 돌리면 맥은 끊어지고 의미는 희미해진다. 일상생활에서는 이런 일이 반복된다. 일상생활, 또는 사회생활 속에 소설 쓰기를 이어가려면, 초인적인 순발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바로 틈새 시간을 모으고 모아서 소설 쓰기에 응집시키는 것이다.
---「함정임, 시작되지 않은 이야기, 끝나지 않은 사랑」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