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는 유명한 고전 작품을 오마주한 작품도 있고, 관장님이 구상해 창작하신 작품도 있고, 기증자의 요구 사항에 따라 제작한 작품도 있습니다. 이 계단으로 내려가면 지하에 전시장이 있습니다. 건물 외관이 그리 크지 않아서 기대 못 하셨을 수 있지만, 아래의 지하 공간은 꽤 광활하고 층고도 높답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제작될 작품들이 놓일 빈 공간도 있고, 관장님의 작업 공간도 있고, 작품 재료를 보존하는 냉동고가 있는 공간도 있습니다. 작업장과 냉동고는 보안상 공개하지 못하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제 계단을 따라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 p.10
…아, 의뢰자분께서 직접 작품이 되기로 마음먹으신 거군요. 네, 이곳에서 저희는 의뢰자를 그 어떤 작품보다 더 아름답게 재탄생시켜 드릴 수 있답니다. 그렇다면 요청하신 ‘신체 기증 서약서’ 겸 ‘작품 제작 의뢰서’를 드리겠습니다. 그럼, 내 신체가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되는 곳, ‘더 바디 갤러리’에 찾아주시고 의뢰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주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 p.25
그는 제 눈앞에 있는 푸른 인어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 푸르지만 고운 피부, 짙은 남색의 입술, 얇게 쪼개어진 보석 파편이 빼곡히 수놓아진 것 같은 은빛 머리칼. 순간, 젊은 어부는 푸른 인어의 아름다운 신체 일부를 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 pp.61~62
그날 밤, 잠든 젊은 어부의 귀에 유리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눈을 떠 보니 잘린 손이 어항에서 헤엄치듯 손가락 마디마디를 현란하고 유연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 p.63
우리는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에 있는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멀리서 불을 반짝이는 배 한 척이 바다 저 멀리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그도 잘 돌아가고 있을까 싶어 가는 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여자가 바다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두 발은 물에 잠긴 상태였다. 이 추위에 바다로 들어간다는 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가 없었다.
--- p.154
“아따, 거참 존나 무섭게 잘 만들어놨네. 이런 건 언제 또 새로 만들어서 가져다 놨대….”
그렇게 중얼거리며 한동안 그 마네킹을 응시하던 재근은 지퍼를 올린 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켜고 영상 녹화 버튼을 눌러 그쪽을 찍기 시작했다.
“이딴 거 만들 돈으로 월급을 더 올려주시던가요.”
어두운 화면 속에서 그 모습이 점차 윤곽을 잡아갔고, 재근은 화면을 보며 두 손가락을 이용해 피사체의 크기를 늘렸다. 곧 마네킹의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노이즈가 잔뜩 낀 얼굴은 머리카락과 옷처럼 까매서 눈코입이 정확히 구별이 되지 않았다.
“…얼굴도 없이 뭐 이따위로 만들어놨어?”
재근은 계속 중얼거리며 그 검은 얼굴을 보고 있었다. 그 순간, 화면 속 검은 얼굴이 빨간 두 눈을 번뜩 뜨며 입을 쩍 벌렸다.
--- pp.218~219
아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독자분들도 꿈에서 기이하고 무서운 일들을 겪으신 적이 더러 있을 겁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제 꿈들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제가 생각해도 저 같은 평범한 사람이 꿈을 통해 미래를 보고 또 다른 차원을 본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연이었거나, 어디서 주워듣거나 본 것들이 수면 중에 마구 뒤섞였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눌린 가위는 꽤 기이하긴 했습니다. 어쩌면 이조차 대수롭지 않은 경험담일 수 있지만 워낙 기억에 남는 경험이다 보니 이 지면을 빌려 한번 얘기해 볼게요.
--- p.2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