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의 행정구역이 서울만큼이나 거대해지고, 가족의 해체를 통한 개인중심 사회로의 변화가 가속화되면서 우리 용인 사람이 함께 공유하고 유지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소중한 이야기들이 흩어지고 소멸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지금은 “우리”는 사라지고 “나” 홀로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저는 어린이, 청소년, 청년, 주부,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우리 용인의 보통사람들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묶어서 용인의 정서를 함께 공유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용인 북클럽의 회원 여러분과 함께한 이러한 노력과 작업들은 앞으로 수년, 수십 년이 흐르는 동안 ‘용인 203 이야기’에 담겨진 하나하나의 작품이 소중한 사회적, 문화적, 문학적가치를 더해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 작은 책은 용인북클럽 가족의 큰 꿈을 담은 소중한 첫 번째 책입니다. 우리의 이러한 노력은 용인이 책 읽는 책의 도시가 되고 지식으로 대한민국을 선도하는 지식 선도 도시 용인이 되는 그날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함께 책을 읽어 주십시오.
용인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용인사람들의 지식과 지혜이기 때문입니다.---클럽지기 정찬민, 〈발간사〉 중에서
"신랑~! 완성~! 어서 와서 드시고 평가해줘~"
평가해달라는 내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너무나 정직한 대사의 목소리다.
"오~냄새는 좋은데, 어디 한번 먹어볼까나~?"
“어때? 응? 어때?”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아직 씹지도 않았어."
신랑은 입에 넣은 부침개를 우물우물하면서 눈동자를 요리조리 굴린다. 얄밉기까지 할 정도로 아직 대답이 없다. 드디어 신랑의 목구멍이 "꿀~떡"이라는 소리를 냈다. 신랑이 입을 연다.
"객관적인 대답을 원해?"
아… 나의 자존심이 벌써 욱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난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응!"이라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소스 때문에 먹을 만해. 부침개 자체는 너무 싱거워. 자기 음식이 대체적으로 좀 싱거운 데가 있어. 점수를 주면 한 86점 되겠네~ 어때 후하지?!"
내가 평가되길 바랐던 부침개도 86점으로 나가떨어졌고, 평가되 길 바라지도 않았던 그동안의 내 음식들도 대체적으로 싱거운 녀석들로 평가되어버렸다. 그냥 맛있다고 한마디 해주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허! 싱겁다면서 오물오물 잘도 먹는구나. 얄밉다. 정말 얄밉다.
내 얼굴은 이미 정색이 되어있고, 객관적 사실만 좋아라하는 우리 신랑은 주관적인 내 표정은 아직 느끼질 못했는지, 먹기만 잘 먹고 있다.---권의경, 〈우당탕탕 신혼일기〉 중에서
1964년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행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던 나에게, 결혼 후 둘째 아들을 낳으면서 내 인생에 가장 큰 시련이 닥쳐왔다.
아빠를 닮아 잘 생긴 외모로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가 첫 돌이 한참 지나도록 엄마 소리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늦된 것뿐이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걱정스런 마음에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을 찾았다. 이것저것 많은 검사를 마친 뒤 의사 선생님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아드님은 자폐성 장애인 것 같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평생 장애아의 엄마로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그때 아이는 갓 두 돌이 되었고 내 나이 겨우 스물아홉이었다---유향금, 〈누구에게나 인생 제2막은 열린다〉 중에서
-4월1일
나눔은 전염병과 같습니다. 구두닦이 봉사로 나눔을 실천해온 지 벌써 5개월이 지났습니다.
첨에 팔뚝에 알도 배고 쑥스럽기도 했습니다만 이제는 아랑곳없이 토시 끼고 그야말로 생활이 되었습니다.
안 쓰던 난로를 필요한 분에게 팔아 3만원을 기부받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길 가다 주운 돈을 제게 주면서 기부하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공인중개사를 하다 보니 관련법률 상담을 해주고 이천 원 기부 받기도 했구요. 난로를 판 데서 힌트를 얻어 집에서 잘 입지 않던 옷을 잘 세탁해서 친구에게 주면서 약간의 기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실지로 옷을 학교에 기부하겠다고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반드시저로 인해 결정된 것은 아니겠지만 작으나마 기여한 것에는 틀림없다는 생각입니다.---정일용, 〈나눔〉 중에서
1972년 겨울 충남 태안의 조그마한 시골마을에 채 동이 트기도 전 아버님은 간밤에 소복하게 쌓인 앞마당의 새하얀 눈을 치우시고, 할아버님은 사랑방 아궁이에 소에게 먹일 여물을 끓이고 계신다. 커다란 무쇠솥 여닫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할아버님의 헛기침 소리가 들리면서 “일어나 학교 가게.” 몇 번이고 못 들은 척하면서 사랑방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려 보지만 매번 바람일 뿐이지 안 일어날 재간이 없다. 얼마나 추웠던지 옆에 있던 숭늉 그릇에 살얼음이 얼어있다. 주섬주섬 내복이며 점퍼며 두꺼운 나일론 양말을 신고 사랑방보다 더 추운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요강을 들고 조심조심 방문을 열고 마루로 나가면 걸을 때마다 “삐그덕 삐그덕” 소리를 내니 내가 일어났다는 것을 부엌에 계신 어머님은 알고 계신가 보다. 마루 기둥에 매달린 희뿌연 등잔이 이리저리 비틀거릴 때마다 밝았다 어두웠다를 반복하지만 요강을 들고 샘까지 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박건석, 〈30여년이 지나서 쓴 일기〉 중에서
“엄마~ 난 용인이 정말 좋아요. 평생 용인에서 살 거에요!”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들이 식사하다 말고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밥 한술을 꿀떡 넘기더니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면 용인에 무덤을 만들어 드릴게요.”
아직 어린 녀석이 부모 무덤까지 챙기다니 허허 소리가 절로 나는데 자기도 돌아가면(?) 꼭 용인에 무덤을 만들어달라고 다섯 살 동생에게 신신당부까지 한다.
옛말에 ‘생거진천 사거용인’이라 했는데, 우리 아들은 ‘생거용인사거용인’인가보다
수십 년을 대도시에서 살던 나에게 결혼 후 처음 온 용인은 참 낯설었다. 교통도 불편했고, 산들이 많아 유독 춥게 느껴졌다. 지금은 이곳에 온 지 어느새 7년차가 되었는데 그 새 참 많이도 변했다. 교통수단도 다양해지고, 생활의 편의도 늘고, 정책들도 다양해졌다. 또한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을 낳고, 아이들의 소매 단이 점점 짧아질수록 보석 같은 추억도 늘어났다. 고사리 손을 잡고,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웃음을 채워 넣다 보니 우리 가족은 어느새 이곳에 애정을 담뿍 느끼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나의 마음에도 내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그것이 아이에게 그대로 투영된 것이리라.---김은미, 〈너는 왜 좋으냐?〉 중에서
고무딱지
알록달록 딱지들!
모두 장점들이 있지.
작아서 공격력은 없지만 방어력이 좋아 이길 수 있지.
큰 딱지는 커서 공격력 좋아 자주 이기지.
하지만 방어력이 안 좋아
내가 좋아하는 건 작은 딱지들!
작아도, 힘이 없어도, 큰 딱지들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좋아.
왜냐구?
나는 크지만 힘이 없고 자주 울어.
때론 애들이 나를 너무 쉽게 생각해.
그래서, 크고 힘이 좋은 것을 이기는 작은 딱지들이 좋아.
---민경원 시, 〈고무딱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