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서구문화에서 물질에 대한 지배적인 의식은, 생존의 수단으로 사용하거나, 미적인 표현의 매체로서 변형해서, 그것에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인간에 의해 작동되는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재료라는 것이었다. 행위성 혹은 의미가 내재적으로 부재하며, 의식에 대해 외생적인(heterogeneous), 무기력한 물질이라는 견해는 고전 과학과 철학에 공고한 기원을 두고 있으며, ‘저기 바깥의’ 자연 세계를 당연히 본질적으로 주어진 대상들의 집합으로 여기는 자연주의적 태도, 혹은 상식과 일치하며, 그것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물질을 이와 다르게, 즉 스스로 변화 가능하며, 개별적이고, 관념적이며, 주관주의적인 영역에 위치한다고 여겨지는 행위자적 능력과 실존적 의미로 이미 충일해 있는 활기찬 물질성으로서 상상해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가능하다면, 우리 현대인들이 이러한 내재하는 생성성을 표현하는 데 어떤 개념적, 혹은 비유적 수단들을 도움으로 삼을 수 있을까? 물활론(animism)이나 종교, 혹은 낭만주의로부터 유래하는 신비주의에 의존하지 않고, 물질의 역동적이고 때로는 저항적인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물질화의 과정과 그것의 생성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 p.137
조나단 리어는 마음을 본질적으로 붕괴 경향이 있는 기능으로 묘사하였다. 의식적인 물질은 삶의 압박 아래 놓이기 때문에 파괴되는 경향이 있다. 삶은 단순히 “너무 과도(too much)한 것이다”. 우리는 비인격적 에너지를 주체와 세계라는 안정된 관념으로 추상화하는데, 그러한 에너지가 힐끗 보일 때마다 무력감을 느끼고 자신의 나약함을 의식한다. 그러한 파괴적이며 비인간적인 에너지는 우리에게 친밀하게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정체를 완전히 식별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그와 같이 비인간적인 것을 개인화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를 떨게 만들고 뒤흔드는 그러한 과잉은 강도와 흐름을 가진 양적 에너지이기 때문에 우리의 노력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리어에 의하면 인간의 반복적인 무력함은 내용이 없는 어떤 사건의 반복이다.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무력감은 너무 많은 에너지의 경험에서 비롯한다. 질이 없는 양의 돌출. 만약 실제로 반복이 있다면, 그것은 에너지의 돌파와 파괴를 유의미한 일상의 삶에 주입하려는 우리의 시도에 내재한다고 할 수 있다.
--- p.196
그렇게 그는 어떤 다른 행동을 할 수 없어서 행동이 중지된 상태에 머물게 된다. 여기에서 불확실하고 불분명한 인물들로 구성된 이 첨단기술의 만화는 연결선이 무리하게 늘어나 있는 빠른 속도의 세계에 붙어 있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논점을 제기한다. 이 영화는 메를로퐁티가 암묵적으로 가정한 삶의 속도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는 세계에 대한 애착을 탐구하고 갱신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우리는 이 세계에 대해 더 진전된 종류의 애착을 개발하고, 우리 내부와 주위에서 너무 쉽게 일어나는 추상적 적의를 물리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리고 우리는 실존적 적의의 불씨가, 일단 뿌려지면, 파괴적인 사건, 미디어의 광란, 그리고 정치 캠페인에 의해 어떻게 불타오르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투자, 소비, 교회 집회, 언론보도, 투표의 패턴, 국가적 우선순위와 같은 제도적 관행에 주입되는지 숙고해 볼 것을 권유받는다. 이 세계에 대해 처음 가졌던 돌봄의 감각이 열려 증폭되는데, 이것은 전술적 수단과 미시정치에 의해 무시되거나 더 강화될 수 있는 감각이다.
--- p.285
요점은 간단하다. 우리가 ‘행위를 함’은 우리가 ‘행위할 수 있음’을 촉발한다. 이것은 ‘함’이 단순히 능력을 제한한다는 것을 논증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행위를 함’이 몇몇 능력들을 확장하고 개방한다. 특정 방향에서의 어떤 ‘확장’이 우리가 다른 측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차례로 제한할 것이라 해도 말이다. 우리가 신체의 특정 부분들을 더 많이 활동하게 할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진다. 동시에 우리가 다른 신체 부분들을 더 적게 활용할수록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적어진다. 그래서 만약 젠더가 우리가 ‘행위를 함’을 모양 짓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모양 짓는다.
--- p.368~369
일상적 삶의 실천과 공간의 구조화가 모두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기능적으로 유익하다고 생각하거나 일상과 공간에 대한 개별적 경험이 획일적(또는 단순히 수동적)이라고 생각하는 환원주의의 함정을 피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서 제시된 근대성에 대한 끝없이 암울한 전망을 그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현대의 삶을 구성하는 물질적 실천이 중요한 정치적·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근거라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실제로 르페브르는 그의 마지막 저서인 『리듬분석』에서 일상생활의 리듬, 특히 도시 공간의 맥락에 서 리듬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 점을 추구한다. 여기서 ‘리듬’은 일상의 반복적인 성격을 의미하지만, “무한히 동일한 절대적인 반복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는 반복과 차이의 관계이다. 그것이 일상, 의례, 의식, 축제, 규칙 및 법에 관한 것이라면 반복적인 것에는 항상 새롭고 예측할 수 없는 것, 즉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매일 같은 경로로 출근하고, 친구들과 같은 종류의 바, 레스토랑 또는 클럽에 가고, 인맥을 넓히기 위해 인터넷 서핑을 하고, 도시 생활공간과 가상적 상호작용을 하는 비디오게임을 하는 등 매우 반복적으로 보이는 현대 도시의 실천 속에도 차이와 그러한 실천이 정치적 저항과 변혁의 장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존재한다. 역사 유물론은 전통적으로 이 마지막 유형의 실천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러한 분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본주의사회의 재생산을 이해하고 사회관계가 어떻게 변화할 수 있는지를 고려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상생활과 생활공간의 조직에 대한 이러한 접근 방식도 중요하지만, 이는 경제 생산, 국가, 국제 체제 간의 관계에 대한 분석과 연결되어야 한다.
--- p.419~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