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3이 된 지금도 나는 도이서라는 이름 석 자보다 선택적 함구증 병신으로 통한다. 도이서 하면 이구동성으로 “아, 입에 거미줄 친 븅신?” “선택적 함구인지 방구인지 그렇다는데?” “그래도 출석 부르면 ‘예’ 하고 대답은 해. 쥐똥만 한 목소리로.” “민수라고 있거든. 욕 잘하고 성질 개더러운 똑똑이. 나도 좀 아는 놈인데, 그 새끼하고는 종종 웃고 떠들고 한다더라. 유치원 동기라나 뭐라나.” “그러니까 선택적이지.” “기분 나빠. 제까짓 게 뭔데 선택을 하고 지랄이람.” 이러면서 불쾌해했다.
--- p.16~17
그나저나 아빠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아프리카 흑인 여대생이 한 지붕 아래 산다는 건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그림인데.
물론 신촌 노고산동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일은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 중의 하나다. 나와 삼촌이 사는 이 낡은 5층짜리 빌라 건너편만 해도 고대 운동 교육기관인 ‘힘의 집’이 있어 이란, 터키, 파키스탄 출신 대학생들이 수시로 드나든다. 취재차 유재석이 온 적도 있었다. 물론 학교에 가느라 구경은 못 했지만.
주변으로 유명 사립대학교가 세 개나 모여 있는 신촌 노고산동은 그런 동네였다. 백인, 흑인, 동양인, 아랍인 등 전 세계 대학생들이 오글오글 모여 사는. 삼촌은 역세권이라고는 하지만, 가파르고 좁다란 산동네라 상대적으로 집값이 싼 탓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 p.28
삼 주째 되던 날 금요일 아침, 여느 때처럼 도이시 미켈란이 배웅을 나와 있었다. 어느 순간 내 걱정은 ‘오늘 아침엔 도이시 미켈란이 없으면 어쩌지?’로 바뀌어 있었다. 정말 짜증 제대로다. 손을 흔들며 현관에 서 있는 그녀를 보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얼굴 근육이 슬그머니 펴졌다.
그런데 그날은 포스트잇 대신 손편지를 건네주는 게 아닌가. 짧지만 강력한 단서 조항과 함께.
“도이서 동생, 지구 말고 학교에 가서 펴 보십시오.”
나는 반사적으로 도이시 미켈란의 얼굴을 바라봤다. 듣고 있던 삼촌이 그새를 참지 못하고 쿵 쿵 쿵 달려와 손사래를 쳤다.
“이시야, 지구 말고가 아니라 지금 말고. 지구 노 노, 지금!”
얼씨구, 이시야란다. 이시야. 그것도 이서야를 부를 때와 같은 다정한 톤으로 말이다. 그러자 도이시 미켈란이 자신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어이쿠! 도이서 동생, 지큼 말고 학교에 가서 펴 보십시오.”
그녀는 손으로 브이 자를 그으며 씩 웃었다. 표정을 보니 협박이나 경고 메시지는 아닌 게 확실했다.
‘나도 참, 별 이상한 상상을 다 하네. 도이시 미켈란이 협박이나 얼럿(경고장)을 보낼 리 없잖아.’
나는 그 상황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아침마다 시트콤 예고편을 보는 것 같은 이 소란스러움이라니……. 그러나 아직은 그 어떤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여전히 심경이 복잡했다.
다들 짐작이나 할까. 엄마는 하늘나라로, 아빠는 아프리카로 떠나보낸 뒤 어떻게든 그 상황에 익숙해지려고 내 깐엔 눈물 나게 애쓰고 있었다는 걸. 그런데 도이시 미켈란이 나타나 겨우 잔잔해지려는 내 마음속에 자꾸 조약돌을 던지고 있다. 그것도 지치지도 않고 매일 아침 이렇게.
--- p.36~37
“이서야, 이거, 너 아크라에 있을 때 형이랑 형수가 만들어 줬던 거라는데 기억 안 나지? 채소랑 고기는 송송 채 썰어 볶고, 시금치는 데친 뒤 무쳐. 그런 다음 삶아서 찬물에 헹군 면이랑 라면 수프 첨가한 엄마표 양념장을 넣고 다시 휘리릭 볶는 건데, 이서 니가 유독 잘 먹었대. 당면 구하기가 힘드니까 그 대신 라면잡채로 이서 네 살 때 생일상을 차렸다더라. 형수 레시피를 이시가 완전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더라고.”
“불어 터져. 얼른 먹어.”
쏙이 재촉했다. 쏙은 정말이지 금산 할머니보다 한국말이 더 구수했다. 그 말에 지유가 라면잡채를 포크에 돌돌 말았다. 민수도 지유를 따라 했다.
“뭐냐, 이 신박한 맛의 조화는.”
--- p.81~82
어느덧 이시 누나가 케이크를 들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물러서지 않겠다는 단호한 눈빛이었다. 목소리도 어찌나 우렁찬지 거실이 다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야, 어른 부러! 쏘원 빌고!”
쏙 누나한테 배운 것 같은 저 확신에 찬 말투라니. 옆에서 쏙 누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입술 모양으로만 ‘어른 아니고 얼른!’이라고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어허, 야! 어른 부러!”
이시 누나가 다시 눈을 부라렸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촛불을 껐다. 싫지 않았다. 그러나 소원은 빌지 못했다. 소원 대신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였다. 그건 바로 ‘이시 누나,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였다.
촛불이 꺼지자 모두 손바닥이 빨개지도록 박수를 쳤다. 내가 촛불을 껐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시 누나의 얼굴엔 행복한 미소가 출렁였다. 삼촌은 가슴을 쓸어내리기까지 했다.
쏙 누나는 자신의 수제자가 백 프로 완벽하게 멘트를 구사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지 “이시, 어른 아니고 얼른. 다시 해 봐, 얼른” 했다.
“어른은 그로운 업, 얼른은 퀴클리.”
이시 누나는 케이크를 들고 거실 으로 사뿐사뿐 걸으면서도 “오 마이 갓! 잇츠 마이 미스테이크. 어른 그로운 업, 얼른 퀴클리!”를 따라 했다.
--- p.131~132
사십구재 날, 삼촌의 낡은 차 조수석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사이드미러에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그 말이 마치 내겐 ‘사람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음’ 이렇게 읽혔다. 나는 운전하는 삼촌을 흘끗 쳐다보았다. 삼촌마저 떠나간다면 나는 절망의 늪에서 헤어 나올 수 없으리라. 난 중3이니까, 엄마가 돌아가신 지 불과 사십구 일밖에 되지 않은 데다 아빠까지 잃게 생긴 천하에 재수 없는 중3이니까. 그래서 쥐어 짜내듯 라면 먹기 싫다고, 저녁 밥상을 차려 내라고 협박하듯 호소한 건데……. 그런데 지금은 그 문구가 이렇게 읽혔다.
사람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 p.137~1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