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회에 발 딛고 사는 20년 동안, 각별한 인연으로 만난 말들을 한자리에 모아보았다. 그들을 모두 백지에 적고 나서 하나하나 차례로 응시하자 그들이 내게 길고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말은 각각의 공동체가 경험과 성찰을 통해 빚어낸 열매다. 열매의 껍질을 벗겨내면 싱싱한 과육이 풍미와 함께 모습을 드러내고, 그 속엔 더 단단한 씨앗이 웅크리고 있다. 과일이 품은 색깔과 향기, 풍미는 이야기고, 씨앗은 공동체가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해온 지혜와 철학, 경험이 응집된 정보의 결정체다. 다음 세대에게 전해져 발아하기를 기다리는.
---「프롤로그」중에서
Bonjour(봉주르: 안녕하세요), pardon(빠흐동: 실례합니다), doucement(두스망: 부드럽게), apero(아페로: 식전주)가 거친 현실에 베이거나 부딪히지 않고 유연하게 시대를 건너게 해주는 말이라면, austerite(오스테리테: 긴축)는 금융자본주의 시대의 승자들이 약자들을 현혹해 지배를 강화하는 데 쓰는 지배자의 언어다. 원인과 과정, 결과가 서로를 배반하는 시대에 사는 사람들이 du coup(뒤 쿠)를 남발하며 존재하지 않는 현상의 연계성을 허공에 지으려 애쓰는 모습은, 우리가 결핍한 요소들을 반영하는 언어적 현상이다. 그런가 하면 solidarite(솔리다리테: 연대)와 laicite(라이시테: 정교분리 원칙)는 숱한 대가를 지불하며 터득한,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궁극의 기술이다.
---「프롤로그」중에서
Doucement은 ‘달콤한’ ‘부드러운’이란 의미의 형용사 douce에 부사형 어미 ment을 붙여 만든 부사다. 우리가 고기를 잴 때 육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달콤한 배와 시럽, 설탕, 꿀 등을 넣는 것처럼, 부드러움과 달콤함이 하나의 단어 속에 들어가 복합적 의미를 구현하고 있는 모습도 재미있다. 거기에 ment을 더해 동작에 스미는 태도를 주문하는 부사가 되면, 이 어휘의 스펙트럼은 더욱 확장되어 ‘천천히’ ‘조심스럽게’ ‘살살’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라고 말하는 모든 경우에 등장할 수 있게 된다. (…) 마치 식수에 들어 있는 성분처럼, 산소와 함께 공기 중에 들어 있는 입자처럼, 날 때부터 두스망의 세례를 듬뿍 받고 일상적으로 들이켜며 성장한 이곳 사람들은 5분 늦을지언정 뛰는 법이 없다. 집단의 규율에 복종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나 자신의 평정이라 믿는, 자아에 무게중심을 두는 세계관도 뛰지 않는 이들의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인일 것이다. 이는 거대 이데올로기 담론이 보듬지 못했던 개인의 자유와 욕망을 사회적 목소리로 전환하고 당당히 존재하게 해준 68혁명이 남긴 유산의 일부이기도 했다.
---「Doucement(두스망: 부드럽게)-아가의 머리를 매만지는 손길 같은」중에서
잠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행위가 사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계기를 전하는 것처럼, 양심의 돌멩이가 움직일 때 머뭇거리는 심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숨 쉴 공간을 제공한다. 인공지능을 통해 세상을 작동시키고자 하는 시대가 눈앞에 와 있다. 인간의 능력은 인공지능의 신속, 정확함에 이를 수 없을 터이나, 두근거리는 심장과 번뇌하고 망설이는 인간의 소프트웨어를 인공지능은 흉내 낼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에서, 신도 기계도 아닌 인간만이 지니는 미덕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신속, 정확하게 작동하는 인간에게서가 아니라, 스크뤼퓔을 지닌 사람, 양심의 미세한 숨소리에 반응하는 사람에게서 발현될 것이다. 바로 거기서 사람들은 휴식을 얻을 것이고, 감사할 것이며, 미소 지을 것이다.
---「Scrupule(스크뤼퓔: 세심함)-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중에서
아페로는 일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일을 하고 있음을 자각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중요한 프로젝트 마무리를 위해 긴장 상태에서 일하고 있는 직장 동료일지라도, 그들은 아페로 한잔을 즐기고 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여유를 찾는다. 긴장, 긴장 그리고 또 긴장이라는 리듬은 용납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기 위해선 반드시 이완의 순간이 필요하다는 원칙이 프랑스적 일상에 실전으로 정착한 문화가 바로 아페로다. 아페로를 즐기는 순간, 우린 살아가려 애쓰는 처절한 생존 기계가 아니라, 삶을 즐기는 유쾌한 존재들이란 사실을 서로에게 일깨워준다.
---「Apero(아페로: 식전주)-일상의 천국을 여는 세 음절」중에서
말은 인간에게서 생각을 발현시키는 도구이자 행동과 변화를 끌어내는 씨앗이다. 말이 갖는 힘은 때때로 우리의 상상을 앞질러간다. ‘아름다움’과 햇살 가득한 날씨를 연결하는 어른들의 말을 따라 하면서, 아이는 해를 향해 경의를 표하는 문화를 익히고, 아름다움을 일상의 곳곳에서 발견하는 그네들의 습관을 배우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아름다움’이란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는 프랑스인의 DNA가 무럭무럭 자극받으며 성장하고 있었다.
---「Il fait beau(일 페 보: 아름다운 날씨로군요)-아름다움을 포착하고 찬미하는 감각」중에서
인류는 어느 순간부터 자연을 자신과 동떨어진 존재로, 그리고 제압해야 할 혹은 이용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왔다. 자연을 제압해온 인간은 그 자리에 문명이란 이름의 성취를 남겨왔으나, 동시에 가파르게 계급 간의 갈등과 고통을 빚어냈다. 거리에 차가 많아질수록, 일상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아파트의 층수가 높아질수록 우린 점점 더 자연에서 멀어졌다. 지금 대다수의 인류는 항상성의 가능성에 대해 까마득히 잊은 듯하다. 그러나 누구든 꼼짝없이 한 시간 정도 마주 앉아 이 단어를 마주하고 그 뜻을 새긴다면, 맨발로 땅을 딛고 서서 하늘을 차분히 응시한다면, 물기를 머금은 딱딱한 씨앗이 마침내 껍질을 뚫고 싹을 피워내듯, 생명체로서의 본질에 다가가는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말들은 여러 해 공을 들여 품고 있어야 비로소 만나고, 친해지고, 내 것이 된다.
---「Homeostasie(오메오스타지: 항상성)-인간이 우주와 하나가 될 때」중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프랑스에 와서 에파누이스망이란 단어만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이 단어를 통해 이러한 인간의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인의 말처럼, 인간의 가능성이 만개했을 때의 희열을 묘사하는 단어가 존재함으로써, 우리는 그 상태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년에 한두 번, 혹은 수년에 한 번, 그러니 아주 가끔, 나는 에파누이스망을 경험하는 나와 타인을 목격한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 걸린 무지개를 보는 것처럼, 축복 같은 ‘경이’의 순간이다.
---「Epanouissement(에파누이스망: 개화)-자아가 만개하는 경이의 순간」중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내 미용사ma coiffeuse’를 말하듯 쉽게 ‘내심리치료사mon psy’를 언급한다. 그가 psychiatre(정신과의사)든 psychologue(심리학자)든 psychotherapeute(심리치료사)든 psychanalyste(정신분석가)든 많은 이들이 자신의 무의식에 갇힌 생각과 경험, 두려움, 회한, 욕망 등을 마주하고, 자아와 화해하고 치유하는 것을 도와줄 사람들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상담 중에 건넨 말은 일상의 대화 속에 흔하게 등장한다. 프랑스의 대학 심리학과에서 가르치는 심리학 이론의 95퍼센트가 여전히 프로이트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이 거대한 산업의 교주가 누리는 권력이 아직도 건재함을 입증한다.
---「Lapsus(랍쉬스: 실수)-무의식을 드러내는 혀」중에서
떠나가지만 다시 돌아오는 영원한 회귀의 세계와, 한번 나타났다가 사라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단선적 소멸의 세계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공존한다. 이 씨줄과 날줄은 서로를 동경하는 듯, 서로를 향해 끊임없이 경도된다. 동양에서 살 땐 동양이 한없이 서구를 동경하고 모방하는 듯 보였으나, 서양에 살고부터는 오직 동양에서 온 것만이 오늘의 서양인들을 매혹할 향기를 지닌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는 풍속을 없애려 하고 음력을 양력으로 대체하며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기독교를 통해 구원의 문을 두드리는 동안, 이곳 프랑스에서는 음양의 이치를 통해 서양철학이 소명하지 못한 세계를 통찰하려 하고 풍수와 동양의 호흡법을 배운다. 우리는 이 지치지 않는 움직임을 역사라 부른다.
---「Il s’est eteint(일 세 에탱: 그의 생명의 불이 꺼지다)-단선적 세계와 회귀하는 세계」중에서
프랑스에서 파업보다 더 복합적인 뉘앙스를 갖는 어휘는 총파업이다. 총파업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가장 먼저 대중교통이 멈춰 서는 걸로 감지된다. 파리의 모든 대중교통은 국영이고 노조가 매우 잘 조직되어 있다. 총파업이 시작된다는 건 지하철도 버스도, 때로는 철도도 비행기도 안 다니는 혼돈의 상황, 즉 상당한 불편함이 초래됨을 의미한다. 한 가지 위안이라면 이 불편함이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많이 가진 자들이 더 가지기 위해 덜 가진 자들의 마지막 콩알까지 빼앗으려 할 때, 파업은 제 몸만이 재산인 사람들이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며, 대다수의 시민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다.
---「Greve(그레브: 파업)-풍요를 분배하기 위한 시간」중에서
많은 이들이 자유, 평등, 박애에서 다분히 종교적 색깔을 띠는 18세기식 개념 박애fraternite가 현대의 단어인 솔리다리테로 바뀌는 게 맞다고 지적한다. 혁명은 18세기에 이뤄졌고, 혁명 세력은 당시의 가치와 상식에 근거해 박애를 말했으나, 그것은 오늘의 사회에서 연대로 해석되고 발효되고 있음은 명백하다. 제국주의 시절 뿌려놓은 불화의 씨앗들과, 수많은 이민자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가 서로 어우려져 살아가는 프랑스 사회에서 그나마도 이만한 평화를 지탱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가치는 솔리다리테다.
---「Solidarite(솔리다리테: 연대)-우리 모두는 연결되어 있으므로」중에서
데농세가 커튼을 들춰 올리는 행위라면, 델라시옹delation은 커튼 뒤에 누가 있는지를 소곤소곤 전하는 행위이고, 아퀴제는 뾰족한 창끝으로 진실을 가리는 커튼을 거칠게 찢어발기며 거짓을 정면으로 타격하는 행위다. 에밀 졸라가 대통령에게 쓴 편지를 “J’Accuse…!”라는 제목으로 뽑아 1면에 실은 언론 〈로로르〉의 패기와 작가 졸라의 지식인으로서 명징한 태도는 아퀴제를 펜촉과 창살의 날카로운 힘이 더해진 강력한 금속성의 어휘로 역사에 각인시켰다.
---「Denoncer(데농세: 일러바치다), Accuser(아퀴제: 고발하다)-나는 고발한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