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안 돼, 저것 안 돼’라는 엄격한 제약 대신 처음 맛보는 식재료, 새로운 조리법에 시선을 두니 시야가 위로 아래로 시원하게 트였다. 먹을 수 없는 무엇보다 앞으로 먹게 될 무엇을 생각하면 막연함은 사라지고 되레 자유로워졌다. 채식은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의 세계였다. 이렇게 몸과 마음의 전환이 근소한 시차로 동시에 이루어진 데는 비건 베이킹의 역할이 컸다. 우연히 발을 들이게 된 비건 베이킹은 과학 실험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전 세계 비건 베이커들이 버터, 계란, 치즈 등 동물성 식재료를 대신할 레시피를 개발하기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눈에 그들은 뛰어난 과학자이자 창조적인 아티스트인 동시에 사랑을 수호하는 괴짜 마법사처럼 보였다.
--- 「계란 대체재│ 사랑을 수호하는 마법사들」 중에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가장 어렵다는데, 평범한 치아바타 역시 닿을 수 없는 목표처럼 영영 멀어져 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잔뜩 의기소침해 있거나 분기탱천하여 마카롱 여사님의 영상에 악플을 다는 만행은 저지르지 않았다. 빵 반죽이 풍미를 끌어올리며 장시간 분투하는 사이 나는 나대로 정다운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치아바타를 굽기까지 나는 바쁘게 한가롭다. 냉장고의 반죽이 휴식하는 동안 뭉친 승모근을 풀거나 눈에 거슬렸던 가스레인지의 묵은 때를 닦으며 시간을 보낸다. 오븐을 켠 뒤에는 빵이 타진 않을까 애태우느라 책의 같은 페이지를 읽고 잊고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싱크대에 기대어 앉아 원고 마감과 엄마의 환갑 중 어느 쪽에 더 일정을 할애할 수 있을지를 저울질하던 날에는 치아바타가 무슨 대수인가 싶어 낙담하다가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빵 익는 냄새에 마음이 금세 풀리고 말았다.
--- 「치아바타│ 바쁘게 한가로운」 중에서
손으로 무언가를 만들게 되면 스스로에게 믿음이 생긴다던, 자신과 가족을 지지할 수 있다고 말하던 마리아 씨의 단단한 목소리를 마음의 나침반처럼 삼고 있다. 시간이 흘러 엄마도 나도 할머니가 되었을 때, 그저 나이가 조금 더 많고 적을 뿐인 할머니 친구가 되었을 때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살 수 있을까. 각종 영양제와 오늘의 운세, 30평 아파트가 줄 수 없는 그 무엇을 알아내기 위해 일단 앞치마를 당겨 묶는다. 오븐을 켠다.
--- 「망해도 괜찮은 베이킹│ 일단 양말부터 꿰매보세요」 중에서
다가올 미래는 결코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는 자연의 엄중한 경고를 두려워하면서도 동시에 자연이 내어주는 땅과 뿌리에 살며시 희망을 걸어보는 사람들과 함께여서 내 삶도 허기에 빠질 일 없이 무사히 이어지고 있다. 부지런히 먹는 것만으로도 보답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황송할 뿐이다. 스위트피의 깍지를 벗기며, 입가의 복숭아물을 손등으로 쓱 훔치며 나도 모르는 새 빚진 무수한 얼굴들을 떠올린다. 실은 떠오를 리 없지만, 그렇지만, 그려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마주한 얼굴이 내게 무어라 말을 거는지 유심히 들어볼 것이다.
--- 「키쉬│ 짓는 사람, 파는 사람, 먹는 사람」 중에서
늦은 밤 오븐에서 호밀빵을 꺼내며 “이런 게 사랑이지” 하고 콧소리를 내는 빵고모님의 조용한 열정을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스무스하게 받아들였다. 정식으로 제빵을 배워본 적 없는 홈베이커임을 알게 된 뒤로는 신뢰가 더욱 깊어졌다.
그의 빵 이력에도 한때는 맛없음의 구간이 존재했을 테고, 일상을 휘젓는 온갖 지겨움 속에서도 맛있음을 향해 나아갔을 애정을 생각하면 영상에 소개된 노하우들이 더욱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밤마다 이불을 덮은 채 업로드된 영상을 역순으로 시청하기를 여러 날. 마침내 내 부엌에서도 쿠프(빵의 반죽 표면에 칼집을 내는 것)를 근사하게 벌린 통밀빵이 완성됐다. 빵을 굽는 동안 입고 있던 셔츠는 물론 이불과 옹심이의 뒤통수에서도 구수한 밀가루 냄새가 풍겼다.
--- 「통밀빵│우리의 홀가분한 얼굴」 중에서
한 잔의 커피를 마시기 위해 매번 원두를 볶고, 알맞은 그릇과 욕조의 위치를 고집스레 지키려는 마음이 삶을 럭셔리로 이끈다.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는 말은 한없이 다정하고 달콤하게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때로 그 조언은 스스로를 자괴감에 빠트리는 함정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때로 시끄럽고 지독히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그 일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전력을 다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본다. 재미난 이야기, 슬픈 이야기, 지루한 이야기, 돈으로는 사지 못할 값비싼 이야기가 자신 안에 모여 있다. 그러니 내가 시간을 들여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샘물처럼 솟아나는 이야기들을 스프링 노트에 성실히 받아적는 것일 테다. 안이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비밀기지에서 나는 그 일을 하고 싶다. 내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그 일을.
--- 「꿈의 부엌│떡국 그릇과 행복의 상관관계」 중에서
빵과 디저트를 만들기로 결심했을 때,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굽는 사람은 결코 없을 것이다. 달큰한 애플파이 한 접시, 오늘 만든 깜빠뉴 한 덩이를 조각조각 잘라 나누는 친절을 홈베이커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배웠다. 이 세상에 나만이 줄 수 있는 사랑이 있다면 바로 이것일 테다.
--- 「에필로그 _ 다르게 사랑하기로 했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