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로부터 철학이 한 민족의 각 시대에 있어서의 역사적 인간존재들에게 현재와 미래를 위한 , 그 위에 금자탑이 세워질 수 있는 초석을 놓아 주어야 하며 또 그럴 수 있으리라는 외적 인상이 쉽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기대와 요구는 철학의 본질과 능력을 넘어서는 무리한 것이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와 같은 무리한 요구는 철학을 헐뜯는 모양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서 사람들은 형이상학이 혁명을 준비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어던져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마치 대패 판이 날 수 없으니까 버려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과 똑같이 현명한 행동인 것이다. 철학은 결코 직접적으로 역사적 현실을 이끌어 나갈 힘을 가져올 수도 없고 또 행동의 가능성이나 그 형태를 창조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다만 다음 한 가지 사실, 즉 철학이 직접적으로는 항상 극소수의 사람들과만 관계하고 있다는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 창조하면서 스스로를 변화시켜 나가는 사람들, 변혁하는 사람들. 철학은 간접적으로 그리고 결코 그 방향을 정할 수 없는 에움길을 통해서 넓게 퍼져 나가, 그래서 언젠가는 원래의 철학이라는 것이 벌써 잊힌 지 오래되었을 때, 마치 자명한 사실처럼 인간존재의 평범한 상식 속에 점점 그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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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만일 알기를 기원한다면, 그 사람 또한 틀림없이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질문을 말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진정 질문이 시작되는 곳에서는 질문하기를 그만두고 만다. 질문함이란 앎에의-의지(Wissen-wollen)인 것이다. 누가 무엇을 하고자 한다면, 그가 자신의 현존재 전체를 하나의 의지 속에 던졌다면, 그는 결심한, 해결된 사람이다(der ist entschlossen). 해결됨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미루지 않으며, 움츠리지 않으며, 늦춤 없이 당장 행동하는 것이다. 해-결(解-決, Ent-schlossenheit)이라는 것은 결코 행동을 위한 어떤 끝맺음(Beschluß)이 아니라, 모든 행동에 앞선, 그리고 모든 행동을 꿰뚫는, 행동의 결정적인 시작이다.
--- p.51
철학은 결코 그 스스로를 과학과 동일한 계열에 놓아두지 않는다. 철학은 그들에 앞서 그 위치를 정했으며, 이것은 그저 ‘논리적’일 뿐이거나 어떤 과학체계의 도표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철학은 정신적 존재에 있어서 전혀 다른 영역과 품위에 속하는 것이다. 철학 그리고 철학적인 사고와 그 서열(序列)을 같이 하는 것은 다만 시(詩) 안에서 찾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작(詩作, Dichten)과 사색(思索, Denken)하는 것은 서로 같지 않다. 아무것도 아닌 것(無)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과학에게는 언제나 하나의 공포이며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그에 반해서, 이것은 철학자를 제쳐 놓고는 시인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일상생활에서 생각하듯이 시작(詩作)에 있어서 어떤 비엄밀성이 용납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시작에는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오로지 참된 그리고 위대한 시작(詩作)을 말한다] 모든 단순한 과학을 넘어서는 본질적 정신적 우월성이 넘쳐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우월성으로부터 시인은 언제나, 있는 것들이 마치 처음으로 우리의 마음을 이끌고 또 마치 처음으로 말해 오는 것처럼 노래한다. 시인의 시작(詩作)과 사색하는 사람의 사색 속에는 언제나 넓은 세계가 마련되어, 그 안에서 개개의 사물들, 나무 한 그루, 산, 집 한 채, 새의 지저귐들은 그 한결같은 아무 차별도 없음으로부터, 그리고 그 평범성으로부터 오롯이 벗어나는 것이다.
--- p.60
‘있음’(Sein)이라는 단어는 이렇게 해서 그 의미상에서 볼 때 불확정적이며 동시에 우리는 그것을 확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있음’(Sein)은 최고의 확정적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불확정적인 것으로 그 스스로를 나타낸다. 일반논리학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여기에는 누구나가 다 인정할 한 모순이 놓여 있다. 그런데 그 자체 스스로 모순되는 어떤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사각형의 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있음은 최고의 확정적임과 동시에 전적으로 불확정적이라는 모순은 존재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 자신을 속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수많은 해야 할 일들과 귀찮은 일들로부터 멀어져 한순간 이와 같은 것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 자신이 이 모순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것을 스스로 볼 수 있다. 우리의 이와 같은 상황은 우리들이 보통 말하는 강아지나 고양이, 자동차와 신문이라는 사실보다도 훨씬 더 사실적인 것이다.
--- p.145
이 두 가지 가치판단은 그 둘이 모두 다 똑같은 양상으로 현존재라는 것을 미리부터 마치 하나의 어떤 거래영업(ein Geschaft)과 같은 것으로, 손해 보는 아니면 번창하는 영업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계관은 쇼펜하우어의 잘 알려진 다음 말 속에 나타난다: “삶이란 자신의 비용을 되돌려 받지 못하는 하나의 영업이다”(Das Leben ist ein Geschaft, das seine Kosten nicht deckt). 이 말은 ‘삶’이라는 것이 결국에 가서는 그래도 그 비용을 되돌려 주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 ‘삶’(현-존재, Da-sein)은 도무지 영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록 지난 한 세기부터 그것이 그렇게 되어 버리기는 했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리스적 현존재는 우리들에게 이렇게나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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