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특별히 즐겨 추억하는 반 아이가 있다. 인정이 있는 아이였고 유대인들을 대하는 태도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어느덧 의사가 되어 있던 그가 들려주길, 1940년 베를린의 슈테틴 역 근처에서 경찰의 감시하에 끌려가던 유대인들 틈에서 옛 동급생 T를 보았다는 것이다. 몰골이 초췌했다고 했다. “그때 생각했지. 나한테 그런 비참한 모습을 보이는 게 그 아이로서는 여간 곤혹스럽지 않았을 거라고. 나도 마음이 불편해져서 얼른 외면해버렸어.”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 아이처럼 우리를 외면했다. (73쪽)
1937년 그때만 해도 나는 토마스 만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국제사회에서 독일 작가로서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큰 역할을 해내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누가 봐도 확실한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20세기의 독일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이름을 들라고 한다면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대답할 것이다. 독일, 그건 내 눈에 아돌프 히틀러와 토마스 만이다. 두 이름은 예나 지금이나 독일의 양면, 두 가지 가능성을 상징한다. 만일 독일이 이 두 가능성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망각하거나 배제하려고 한다면 그때는 치명적인 결과가 뒤따를 것이다. (93쪽)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침묵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녀는 한참 후에야 천천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두 명의 유대인 청소년은 그때 ‘제3제국’에서 절망적이고 가망 없는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 미래를 우리는 단 한순간도 진지하게 신뢰하지 않았지. 그때 유대인이 어떻게 배우가 되고 어떻게 평론가가 될 수 있었겠어? 하지만 우리는 그 호사를 누렸어. 연극과 문학이 있는 삶을 꿈꿨잖아. 그때 우리를 이어준 것은 아마 우리의 꿈이었을 거야.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그 꿈이 정말 실현됐어. 우리 민족이 학살되는 와중에도 우리는 무사했어. 맞아 죽지도, 살해되지도, 전멸되지도, 가스실에서 죽지도 않았지. 우리는 그럴 만한 이유도 없이 살아남았어. 그건 순전히 우연이야. 우린 알 수 없는 이유로 그 아비규환에서 선택된 아이들이지. 우리는 표식을 단 사람들이야. 마지막 죽는 날까지 우리는 그 표식을 지니고 살아가겠지. 넌 그거 알고 있니?” “그래,” 내가 말했다. “잘 알고 있고말고.” (135쪽)
거의가 그랬다. 군복을 입고 무기를 든 독일 병사들은 누구나 바르샤바에서 유대인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춤을 추게 하거나, 바지에 용변을 보게 하거나,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할 수도 있었다. 느닷없이 총을 쏘아 죽이거나 천천히 더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도 상관없었다. 유대인 여자에게 옷을 벗게 하여 그 속옷으로 도로 포장석을 닦게 한 뒤 만인이 보는 데서 소변을 보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아무도 독일인들이 이런 장난을 치며 느끼는 즐거움을 망쳐놓지 못했고, 아무도 유대인을 학대하고 살해하는 독일인들을 막지 못했으며, 아무도 그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다. 타인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무제한의 권력이 주어질 때 이들이 어떤 짓까지 자행할 수 있는지가 드러난 것이다. (167~168쪽)
벌써 거리로 나왔는데 그녀가 나를 불러세웠다. 하지만 그때 주고받은 말은 몇 마디밖에 되지 않았다. “바르샤바에 계속 있을 거니?” “네.” “정치가 정말 네 천직이라고 생각해?” “네.” “너 실수하는 거야. 네가 있을 곳은 독일이지 폴란드가 아니야. 그리고 네 천직은 문학이지 정치가 아니야.” “문학은 직업이 아니라 저주예요.” “남의 말은 그만 인용해. 나는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아니고 너도 토니오 크뢰거가 아니야. 다시 한번 말하는데, 폴란드를 떠나……” 나는 그녀의 조언을 따랐다. 그러나 아주 먼 훗날에, 이 대화를 나눈 지 12년 만에. (175~176쪽)
별나게 생긴 짐 때문에 시선을 끄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이올린, 클라리넷, 트럼펫, 심지어 첼로 같은 악기를 케이스에 넣어 들고 갔다. 교향악단 연주자들이었다. 나는 몇 시간에 걸쳐 마지막 ‘선별’을 기다리는 동안 그중 몇 사람과 짧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왜 악기를 들고 왔느냐고 물으니 그들은 단어 하나 바꾸지 않고 거의 똑같은 대답을 내놓았다. “독일인들은 음악을 사랑하잖아요. 무슨 곡이라도 하나 들려주면 가스실로 안 보낼지도 모르니까요.” 트레블링카로 이송된 음악가들 중 되돌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233쪽)
혹시 바르샤바에서 막 도착한 그 부부는 옷을 다 벗은 채 ‘호스’ 안을 걸어가고 있지나 않을까? 가스실로 가는 좁은 길을 그렇게 불렀다. 어쩌면 이미 가스실에 들어가 벌거벗은 내 어머니와 아버지 옆에 바짝 붙어 서 있을지도 모르겠다. 샤워실과 비슷하고 천장에 파이프관이 달린 그 가스실 말이다. 파이프에서 나오는 것은 물이 아니라 디젤기관이 뿜어내는 가스였다. 가스실로 밀려들어간 사람들이 모두 질식하기까지는 약 30분이 걸렸다. 죽음의 공포가 덮친 그 마지막 순간에 죽어가던 사람들은 창자와 방광을 통제하지 못했다. 대부분 대변과 소변으로 더럽혀진 시신들은 재빨리 치워졌다. 바르샤바에서 온 다음 유대인들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 (238쪽)
우리를 내보내려고 할 때마다 게니아가 그를 설득했다. “이 사람들은 우리집에 있어야 해요. 오랫동안 함께 버텨왔는데, 조금만 더 있으면 잘될 거예요.” 그러다 거꾸로 게니아가 인내심을 잃을 때마다 자신 있게 외친 사람은 볼렉이었다. “젠장, 우리는 해낼 수 있어. 빌어먹을 독일 놈들이 아무리 발악을 해도.” 두 사람은 계속 보호자가 되어 우리를 숨겨주었고, 우리는 여전히 밤 시간을 이용해 수천 개비의 담배를 만들었으며, 나는 그 긴긴 밤마다 계속 사랑에 빠진 소녀, 젊은 왕자, 늙은 왕, 겨울 동화, 한여름 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59쪽)
내가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고 내린 결정은 1945년 이후에도 있었다. 게다가 그것은 되돌릴 수도 없는 결정이었다. 런던에서 나는 다른 이름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제국을 뜻하는 나의 성 라이히Reich가 영사 업무에 별로 적합하지 못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라이히라는 단어는 독일어를 전혀 모르는 폴란드인이나 영국인도 그 뜻을 알고 있어서 금방 ‘제3제국’을 떠올리게 한다고 했다. (…) 나는 이 문제로 시간을 오래 끌고 싶지 않아 곧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리고 오래 고민하지 않고 라니츠키라는 이름을 골랐다.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에만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이름은 그후에도 나를 계속 따라다녔다. 평생 동안. (291~292쪽)
폰타네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쓴 글을 최소한 상대방이 이해하는 것이다. 문장을 알기 쉽게 쓰려고 노력한 나는 자꾸만 튀어나오는 외래어 대신 거기에 상응하는 독일어를 찾아내려고 외래어 사전을 자주 이용했다. 내가 말하려는 바를 알아듣게 하고 이해시키기 위해 과장이나 강조를 한 적도 많다. 훌륭한 평론가란 언제나 명료함을 위해 글을 단순하게 쓰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자신이 전달하려는 내용을 알기 쉽고 투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위태로울 만큼 극단까지 밀고 나갔다. (391~392쪽)
(…) 주제넘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감수하고 여기에서 내 신념을 밝히고 싶다. 문학은 내 삶의 기쁨이다. 여러 작가와 작품에 대한 내 견해, 그리고 잘못되고 빗나간 것까지 포함하여 내가 내린 모든 평가들 속에 그 신념이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엔 문학에 대한 사랑, 때론 섬뜩할 정도의 이 열정이 평론가인 나로 하여금 비평 활동을 하게 하고 내 직분을 다하게 만들었다. 이따금 다른 이들이 나 개인을 봐줄 만한 사람으로 여기고 예외적인 경우에는 호감이 가는 사람으로까지 생각하는 것도 이 사랑 덕분일지 모른다. 아무리 되풀이해 말해도 지나치지 않은 말, 그것은 바로 문학에 대한 사랑 없이는 비평도 없다는 말이다. (393쪽)
(…) 토마스 만이 『부덴브로크 가』를 쓰고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쓰고 카프카가 『심판』을 썼을 때, 그들은 자신의 소설이 사회를 개선할 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20세기에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작품을 창조했다. 나는 세계 변화를 목표로 하는 문학에는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런 문학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다. 단, 예술성을 포기하고 문학적 형식은 자신이 바라는 정치적 혹은 이념적 요구와 이미지를 포장하는 도구로만 이용한다면 모를까. 하지만 이런 것은 고려의 대상도 되지 못했다.
나는 여느 평론가들처럼 가르치고 교육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대상은 작가가 아니었다. 교육을 받아들이는 작가는 교육할 가치가 없다. 내가 염두에 둔 대상은 대중, 곧 독자였다. 간단히 말하겠다. 나는 독자에게 내가 훌륭하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책들이 왜 훌륭하고 아름다운지를 설명하고자 했다. 독자에게 그 책들을 읽히고 싶었다. 나는 불평할 이유가 없다. 내 평론들은―적어도 일반적으로는―내가 원했던 영향을 독자에게 주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영향을 주었다고 보지 않았다. 더 많은 것을 이룩해야 했다. 내용은 어렵지만 중요한 책들을 소수의 사람들만 읽는 현실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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