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으로 홍어를 주문했다. 미나리를 먹겠다고, 소주를 먹겠다고 말이다. 홍어무침을 만드는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꽤나 많은 잔칫집에 따라다녔다. 요즘 말로 하면 ‘프로 참석러’라고 해야 할까. 내가 초대받은 적은 없으나 할머니를 따라서 갔었다. 친척 어른의 생신, 집들이, 승진 축하연, 회갑연, 고희연, 산수연, 결혼식 등등. 못 보던 사람들과 못 보던 음식들로 가득 찬 분위기를 나는 제법 즐겼다. 당시의 내가 잔칫상에 등장하길 기대했던 음식이 홍어무침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은 없다. 은밀한 기대였다. 절여서 식감이 달라진 무와 오이, 알싸한 도라지 사이에 숨어 있던 홍어의 맛은 그때까지 내가 겪어 보지 못한 그 무엇이었다. 하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소주였다. 홍어무침은 밥 반찬보다는 소주 안주로 적합한 음식이라는 걸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홍어무침에 소주를 먹는 어른들, “크으” 소리를 내며 고개를 흔드는 어른들을 구경하며 내가 소주를 먹게 되려면 얼마의 세월이 흘러야 할지 헤아려 보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미나리욕欲을 위한 것들」중에서
식전주의 시간이다. 밥을 먹기 전에 마시는 술. 안주와 함께 먹지 않는 술. 술만으로 온전한 술. 이게 식전주다. 3시와 5시 사이는 식전주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간에 마시는 식전주를 꽤나 좋아한다. 술은 다 각각의 매력이 있고,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지루할 때도 피곤할 때도 좋지만, 식전주의 시간에 마시는 술도 좋다. 주로 맥주이지만 가끔은 아페리티프를 마신다. (...) 마음이 막 들뜬다. 이 술을 다 마시고 나서 어떤 술을 본격적으로 마실지, 또 어떤 음식과 먹을지 생각하게 된다. 식전주를 마시지 않아도 오늘의 안주와 오늘의 술에 대해 생각하지만 식전주를 마시면 좀 더 열렬해진다고나 할까. 없던 열정도 솟아나는 걸 느끼며 식전주의 위력에 놀란다. 가볍고, 청량하고, 산뜻한 이 술에 이런 힘이 있었나 싶다.
---「3시와 5시 사이의 술」중에서
한동안 금주를 했다. ‘한동안’이라는 말을 적었으니 절주라고 해야겠지만. 다시 술을 마시기로 한 것은 다자이 오사무 때문이다. 그의 기일에 술 한잔하지 않을 수 없어서. 어제였던 6월 19일은 그를 기리는 날이었다. 그의 시체가 발견된 날이자 그가 태어난 날. 이 세상에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 날. 앵두기였다. 다자이 오사무를 기리는 이들은 이날을 앵두기로 부른다고 한다. 그가 죽기 한 달 전에 발표한 단편 소설이 「앵두」이고, 마침 6월 19일 무렵이 앵두철이기도 해서라고 들었다. 앵두기에는 무엇을 하나? 앵두를 먹나? 아님 술을 마시나? 어떤 술을 마시지? 그는 술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의 술 먹는 자세를 높이 사는 사람이므로 앵두로 술을 담가 그의 기일에 마시고 싶었다. 술에 대한 책도 쓰시고 술도 담그시는 분께 앵두주를 담그는 법까지 알아 두었다. 이럴 때 나는 꽤 적극적으로 바뀐다. 문제는 앵두를 구할 수 없었다는 것.
---「다자이 오사무처럼 마시기란 이런 것」중에서
맞다. 술과 굴은 정신에 이바지하는 음식이었다. 내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채우는 게 아니라 영혼을 들어 올리는 음식 말이다. 우리가 땅에 붙어 있는 존재라는 물리적 지엄함을 배반하면서. 음식을 먹고 그런 기분이 들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니 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게 굴의 그 광물적인 맛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굴에 착 달라붙던 샤블리 때문이기도 하고. 굴에 샤블리가 왜 이렇게 어울리는지 그때는 몰랐다. 샤블리가 지역 이름이며 그 땅에서 자란 포도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샤블리라고 부른다는 것과, 그곳이 고대의 굴 화석으로 뒤덮인 서늘한 땅이라는 것을. 굴과 마시는 샤블 리가 그렇게나 충일했던 것은 그저 9월의 파리 공기와 내 기분 탓만은 아니었다. 샤블리는 굴을 먹고 자란 술이었다. 샤블리를 마신다는 건 굴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굴과 샤블리」중에서
산토리에서 나온 가쿠빈으로 하이볼에 입문, 조니 워커와 글렌리벳 하이볼을 좋아하던 나는 라가불린으로도 하이볼을 만든다는 걸 알고 좀 놀란 적이 있다. 스모키한 맛보다는 달달한 맛의 위스키가 하이볼에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또 라가불린은 하이볼을 만들기에는 넘치는 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셔 보니 아니었다. 라가불린으로 만든 하이볼은 조니 워커 레드나 글렌피딕 12년산으로 만든 하이볼에는 없는 다른 게 있었다. 라가불린 맛. 라가불린 하이볼에서는 라가불린 맛이 났던 것이다.
---「하이볼이라는 흥분」중에서
마음이 즐겁게 쓴 글이다. 나의 밤을 나누고픈 사람에게 종알대는 느낌으로 썼다. 그래서 말을 좀 했다. 평소의 나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편이다. 발성을 하는 일이 귀찮게 느껴질 때도 많다. 뭘 구차하게 이런 걸 다 말로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시시한 말을 할 바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술을 마시는 게 좋다. 말하는 걸 좋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말을 듣고 있으면 역시 아무 말이나 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고요에는 말보다 훨씬 풍부한 것들이 깃들어 있어서, 고요보다 못할 말이라면 그냥 입속에 두는 게 좋다고도 생각해 왔다.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