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약 스무 개의 타투가 있다. 그만큼의 타투를 새기면서 주변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 범주에조차 들어가지도 않을 타인들로부터 별의별 참견과 잔소리를 귀가 닳도록 들어왔다. 이를테면, 할머니 돼서 어떡하려고 그러냐, 웨딩드레스 어떻게 입으려고 하냐, 몸에 낙서를 왜 하냐, 양아치냐, 조폭이냐, 남자친구가, 미래 남편이, 시어머니가 싫어하면 지울 거냐, 후회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이처럼 내가 잘못된 ‘짓’을 ‘저질렀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개비스콘 짤이 떠오른다. 긴 연휴가 끝나고 출근을 앞둔 직장인처럼 가슴속이 참 갑갑―해지고 마는 것이다.
---「행운을 가져다준 고드릭 그리핀도르」중에서
한편으로 책 타투는 나 자신에게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심어주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정체화함으로써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고 싶었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믿어줄 때 가장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니까. 타투는 그 어떤 말보다 직관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며 생각에 변화를 일으킨다. 그건 지난날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건네는 응원과 격려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글과 타투」중에서
옛사람들이 그랬듯 나 또한 부적을 붙이듯 타투를 새길 작정이었다. 타투는 피부 위에 새겨지는 것만으로도 잊고 싶은 과거로부터 탈피하게 해주는 기능이 있다. 때로 타투는 삶을 변화시켜주는 촉매가 되어주기도 한다. 걱정과 불안이 발생하는 몸의 안쪽, 흉곽 하부에다 타투를 새겨 넣으면 내 안에 부유하는 불안을 몰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수천 년 전, 외치가 주술적 믿음을 가지고 환부에 타투를 새겨 넣은 것처럼, 나아질 수 있다는 확신이 내겐 필요했다.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중에서
‘선타투 후뚜맞’이란 ‘먼저 타투를 하고 나중에 뚜드려 맞자’라는 의미로, 부모와의 갈등을 각오하고서라도 타투를 새기겠다는 타투인들의 의지가 담긴 은어다. 어쩌면 각오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선타투 후뚜맞」중에서
언니가 내게 건네준 여러 방식의 위로와 응원의 메시지들, 우리가 언제나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들. 언니와의 우정 타투는 그런 걸 떠올리게 한다. 고작 100원 동전만 한 작은 타투이지만 그걸로 내가 얻는 에너지의 크기는 가늠할 수 없다. 단지 몸에 새긴 것뿐인데 유대감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타투는 영적인 속성을 지닌 것도 같다.
---「언니가 나의 자매라서 다행이야」중에서
타투하고 싶다며 스스로 도안까지 찾아와 보여주는 사람들을 설득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나는 도안을 찜해놓을 정도로 타투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겐 ‘당신에게 이 타투가 얼마나 찰떡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주접을 떨어댐으로써 용기를 북돋아주는 전략을 택한다. 그럼에도 그들은 끝끝내 안 되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그러니까 내 경험상 ‘타투하고 싶다’라는 말은 ‘퇴사하고 싶다’ 혹은 ‘헤어지고 싶다’라는 말과 비슷하다. 그러고는 싶지만, 실제로 그러지는 않겠다는 말.
---「나중에 후회하면 어쩌려고 그래?」중에서
잠든 할머니 옆에 앉아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데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는 소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유독 크게 자란 그 나무는 얼마 후면 큰 아픔을 감당해야 할 나를 미리 위로라도 해주는 듯이, 바람에 흔들리지도 않고 나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었다. 나무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곧장 휴대폰을 들고 나가, 나무를 사진에 담았다. 할머니와 함께하고 있는 이 고요한 오후를 기억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며칠 후 그날의 나무는 내 왼팔에 새겨졌다.
---「떠난 이를 그리는 방식」중에서
사실 타투로 상처를 치유받는다는 말에는 오류가 있다. 타투를 새기는 일 자체가 상처를 내는 과정이어서 치유보다는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일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상처는 치유의 기능을 하며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상처를 상처로 치유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나는 다음에도, 다다음에도 타투의 상처를 감수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타투가 또 다른 타투로 잊혀지네(feat. 커버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