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목사는 본질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해, 핵심을 놓치지 않으려는 모색과 사색에 치열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모든 사건과 사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했다. 종국에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결정에 맡기는 순종에 이르렀다. 노자와 장자를 읽고 교단 내에서는 다소 불편할 수도 있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사상은 진정한 기독인의 그것이었다.”
---「고희범, 본질과 핵심을 놓지 않는 구도자의 삶」중에서
“그는 ‘누구하고도 싸우지 않겠다’는 말이 누구하고도 싸우지 않는, 아니 싸울 수 없는 빛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어두운 세상 한복판에서 그 누구를 피하거나 겁내거나 그 무엇에 부딪쳐 넘어지는 일 없이, 오늘도 내일도 그 다음날에도 내게 주어진 길을 갈 뿐이라 하신 스승님, 그렇게 초연한 참여의 본을 보여주신 스승님을 앞에 모시고, 그분 시늉을 하면서, 가는 데까지 가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닮기도 했지만, 이런 점에서 노자도 닮았다.”
---「조현, 영성가 이현주를 만나다」중에서
“인간은 유한한 시간과 공간에 제한된 존재지만 무한한 영원을 상상할 수 있으며, 우주의 궁극적인 의미를 질문할 수도 있다. 인간과 자기초월 사이의 유일한 방해물은 인간 스스로가 세워놓은 경계선이다. 이현주 목사는 인간이 세워둔 경계선이나 틀을 벗어나 사유하면서 자아의 확장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그에게 자기초월은 영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자기초월은 자신을 초월한다는 의미다. 자기 정체성을 넘어 자신이 더 큰 무언가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는 기독교라는 틀을 벗어나 일어나는 일들을 더 넓은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자기를 넘어서는 더 큰 존재, 신神과 초월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오수성, 자기초월적인 오후 인생」중에서
“이현주 선생이 그동안 번역하거나 저술한 책을 보면, 선생의 시선은 유·불·도뿐만 아니라 이슬람과 유대교, 힌두교의 고전古典까지 시선이 넓다. 그러나 선생의 시선은 다양한 종교적 외피나 경직된 교리가 아니라, 해당 고전이 가리키는 영성적 진리를 수행과 깨달음으로 꿰고 있다. 기독교의 하느님이든, 이슬람의 알라든, 또는 노장의 도든 불교의 불성이든, 신앙으로 받드는 게 아니라 본래 내안에 있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현주의 시선은 포함包含이나 회통會通을 넘어, 이미 존재하는 ‘영성’을 ‘깨달음’이라는 키워드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는 통합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는 것이다. 여러 물줄기가 바다에서 만나듯, 산행길이 여러 갈래지만 한 정상에서 만나듯, 성현의 다양한 가르침이 모두 궁극의 한 길로 향하는 것이다.”
---「김용우, 함께 길 걷자는 초대」중에서
“그는 자기 몸을 교회로 만들고 싶어 했다. 거꾸로 살았던 예수가 자기 안에서 살아가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이 역시도 쉽게 이룰 수 없는 바람으로, 오만한 일이다. 이를 위해 백사천난白死千難의 노력을 해왔을 것이다. 이런 그를 보면 어머니처럼 모든 이를 품는 교회를 상상하게 된다. 노자에 대해 쓴 그의 글을 보면 예수와 노자와 이현주가 하나로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최근 청각장애 탓에 잘 듣지 못하나 오히려 사람들 마음을 더 잘 알게 되었다는 그의 말을 전해들으며 그가 애써 이룬 경지에 깊이 감사하고 싶다.”
---「이정배, 이현주 목사의 신앙과 신학」중에서
“나에게 선생님은 앞서 걸어간 발자국이다. 그 발자국은 숲속 오솔길이나 단단한 바위에도, 미끄러운 뻘밭이나 흐트러진 모래톱에도 나있다. 나는 가끔 그 발자국을 살피며 내 걸음을 고른다. 달을 가리키던 선생님이 드디어 팔순에는 달이 되셨는지, 아니면 언제쯤 되실는지 나는 모르겠다. 사실 그건 중요하지도 않다. 다만 선생님처럼 나도 달을 좇다 달이 되는 그 여정에 있다는 것, 그 하나는 분명하다.”
---「김수진, 달을 좇다 달이 되는」중에서
“우리는 ‘정답(정해진 답)’을 찾아 질문했지만, 선생님은 중요한 것은 ‘답’이 아니라 가슴에 있는 ‘질문’이라고 하셨다. 어떤 질문을 품고 사는가에 따라 그 사람이 나아가는 방향이 달라진다.”
---「김희선, 따스하고 넉넉한 품에 기대어」중에서
“선생님은 사람이 살면서 빛과 어둠을 경험하지만 실재하는 건 빛뿐이라고, 만날 때마다 이야기하신다. 어둠은 다만 빛의 부재 또는 가로막힌 빛일 뿐이라고, 실재하는 건 사랑뿐이라고, 그늘 속에서 빛을 함께 보라고 말씀하신다. 모든 것 속에 있는 나를 보라고,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나를 보라고.”
---「이재심, 산문을 선집하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