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는 무한히 용서하고 무한히 위로하는 빛이라는 중심축이 있었다. (…) 주위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적시는 빛이 내 존재를 지탱했다. 그 빛, 그리고 나를 하늘로, 나 자신의 바깥으로 끄집어내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던 새들이 내 삶에 희망이라 부를 만한 것을 가져다주었다.
--- p.32
마치 총에 맞은 것처럼 일부러 날기를 포기하고 곤두박질치던 비둘기들, 그러다 지면까지 불과 몇십 센티미터를 남겨두고 그 하강에서 벗어나 다시 날개에 힘을 주고 너른 하늘로 솟구치던 나의 비둘기들.
--- p.32
아침이면 우리 지붕마루에 나란히 앉아 공기가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던 새들을 보며 나는 이해했다. 이들은 빛이 있어 행복하구나. 새들에게는 날개 밑으로 보이는 땅바닥이 밤새 달라졌다고 낙심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무엇을 마주치든 그것이 그들의 비행에서 활기와 아름다움을 앗아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 p.76
이 시대는 절망에 믿음을 걸라고 우리를 강하게 유혹한다. 나는 이곳에서 그 강력한 유혹을 물리칠 근거를 발견한다.
--- p.88
사람들은 피해자들이 가장 욕망하는 응징의 방식이 돈과 정의이며 거기에도 순번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내 짐작을 말하자면, 피해자들이 가장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믿어주기를 바란다. 존엄의 감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는 토대를 원한다. 자기 존중의 회복이 돈보다 중요하다. 복수보다 중요하다.
--- p.107
모든 장소는 유일무이하며 다른 어디에서도 되풀이되지 않는다. 놓치는 순간 사라져버린다.
--- p.122
다양성은 생명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다양성을 말소하는 것은 탄소를 제거해놓고 생명이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p.124
하늘을 날 때마다 다양하게 생동하는 이 행성의 표면과 밀접한 시각적 접촉을 유지하던 덩컨에게서 나는 생텍쥐페리와 앤 모로 린드버그와 그 밖의 글쟁이 조종사들이 말했던 이른바 ‘비행의 낭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웠다. 그들이 갈망한 것은 땅으로부터의 자유라기보다 거리의 폭압에서 해방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지상의 장소들과 전혀 다른 종류의 친밀감을 나누었다. 이미 익숙한 장소만이 아니라 난생처음 보는 장소와 나눈 이런 친밀감이야말로 그들이 탐험에서 얻어낸 진정 새로운 발견이었다.
--- p.129
한때 인간은 우리가 사는 장소의 심원을 드나들며 친밀감을 나눴을 것이고, 누구나 그 친밀한 관계에서 곧바로 생성된 본질적인 행복감을 품고 살았을 것이다.
--- p.135
내 기억으로는 집 밖에서 주의를 기울인 날 중 어느 하루도 내가 모르는 무엇, 새로운 무엇이 내 앞에 번쩍 나타나지 않은 적이 없다.
--- p.136
이 무덤덤하고 한갓진 장소에 있는 것이 행복하다. 이 장소와 대화하면서 나는 다시금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간다. 이 장소가 가진 본성은 내가 온전히 알아내기에 너무나 복잡해서, 나는 끊임없이 밀려드는 미스터리에 허우적댄다. 이 장소와의 친밀감, 통합과 수용이 주는 위로를 원한다면, 내가 가야 할 길은 오직 참여―참여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배우는 것―뿐이다.
--- p.137
동물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어떻게 우리와 그들의 관계를 형성하는가. (…) 내게는 현대 북미 선주민 예술이 예술가들에게 촉구하는 외침이 들린다. 비인간계를 더 깊이 탐구하라,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작업하라, 지금 이 샤먼의 정경에 어느 쪽 윤리를 적용할 것인지 담론화하라라는 외침이다.
--- p.190
여행에 어떤 해석을 달 수 있다면, 작가가 된 이후 내 성인기의 여행은 대개 일상을 뒤로하고 문명사회의 보수적인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었다. 매번 멀리 세계의 끄트머리에 다다를 의도는 아니었는데, 결국 그렇게 될 때가 많았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던준주의 타나미사막이나 아프리카 남서부 해안의 나미브사막, 캐나다 북극권의 엘즈미어섬 북부에 서 있을 때, 나는 인간 문화에 대한 명료한 인식과 안도감이 가장 고양되고 타인을 향한 공감이 가장 깊어지는 걸 느낀다.
--- p.216~217
그날 걷기의 목표는―내가 속한 문화에서는 황무지라 여길 땅의 촉각, 후각, 시각, 청각적 세부 사항과―친밀해지는 것이었다. 나는 이 단순한 지각 기술로 낯선 풍경과의 대화를 시작한 지 오래다.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나는 묻는다. 당신 이름을 무어라 부를까? 내가 앉아도 될까? 이제 그만 가야 할까? 낯선 것에 다가가는 이 방식의 유용함을 나는 수십 년간 꾸준히 확인해왔다. 서로 신뢰를 쌓고 취약한 나를 장소에 열어놓고, 그러고서 상호 간의 교류를, 어쩌면 친밀감까지도 희망해보는 것이다.
--- p.245
권력을 쥐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멸종과 인종 청소와 해수면 상승의 시대에 순응하기보다 윌슨의 생명 사랑을 일상의 대화로 가져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절망 속에서 죽기보다 앞에 놓인 가능성을 위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
--- p.254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사랑하는 것, 타인에게도 똑같이 촉구하는 것.
--- p.255
여행은 매일매일 우리에게 이제껏 보지 못한 무언가를 소개한다.
--- p.276
남극―아무도 소유하지 않은 대지, 오스트레일리아보다 더 큰 대륙, 이 행성의 더딘 생물학보다 물리학과 화학 법칙의 설명이 더 많이 적용되는 땅.
--- p.281
태양 아래 산란하는 빛의 양 가장자리로 하늘이 쑥 깊어지고 나팔꽃 주둥이처럼 둘레가 활짝 벌어져 있었다. 티끌 한 점 없이 청결한 공기를 투과해 그곳을 노려보고 있으니, 그 너머에 놓인 것이 더 많은 눈이나 혹은 더 먼 우주의 경계가 아니라 공간조차 없는, 철저히 텅 빈 공허가 아닐까 싶어졌다. 하늘과 설원이 맞닿은 선, 빛에 눌려 흔들리는 가느다란 은빛 줄, 그것의 생생함에서 창조의 가장자리가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순수한 빛과 지형이 빚어낸 우연으로 신성(神性)의 한 측면과―눈부신 하나의 표정, 흘긋 일별하는 시선과―눈이 마주치기라도 한 것 같았다.
--- p.285
연이 곤두박질치다가 솟구칠 때, 공기의 흐름을 아슬아슬하게 타다가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 머리를 틀 때, 나는 바람의 몸부림을, 그 우아한 도약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은 이곳에 사는 유일한 동물이다.
--- p.301
텐트로 돌아오는 길에 바람을 안고 우리가 파놓은 눈구덩이 쪽을 흘긋 바라본다. 우리의 욕망은 지극히 단순했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예술이 내세우는 목표와 겹쳐졌다. 유의미한 것―이 경우 화학―을 명확히 보이게 만들기, 우리가 아는 것을 이해될 수 있게 만들기.
--- p.303
알래스카를 여행할 때 나는 한 장소와 다른 장소가 어떻게 다른가를 자주 생각한다.
--- p.308
나의 내면에 들어가 남들 모르게 나의 공포와 대면하고 말할 수 있다. “그래, 나도 안다. 그래도 부탁이니 함께 가자. 네가 도망치고 싶은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지금부터 보게 될 테니
까.” 마음가짐을 제대로 세우고 행동하는 것은 공포를 수용하지 않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사랑을 길러나가는 법에 관한 이야기다.
--- p.341
오후 태양을 받은 강의 수면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금속판처럼 반짝일 때, 나는 그 눈부심에 두 눈을 감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도 저 한복판으로 들어가 돌아오지 않으리라.
--- p.3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