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의 순간에 영양제 괴짜로서의 자각을 한 나는 그 지경은 아니길 바라며, 약간의 조급함으로 매일 먹는 영양제의 개수를 세어보았다. 비타민C 4알, 비타민B 3알, 유산균 2알, 프로폴리스 1알, 비타민D 1알, 매스틱검 1알, 테아닌 1알… 13알밖에 안 되네. 휴우….
--- p.10
개선시키고 싶은 무언가는 항상 있다. 피로, 무기력, 불면, 소화불량, 면역, 항산화 등등. 규칙적인 생활, 스트레스 없는 하루, 적절한 운동을 대신하려면 일단 5만 원어치면 되겠지? 무료 배송은 넘겨야 하니까. 이 책은 그런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 p.11
나는 개인적으로 간을 간 과장이라고 부르고 있다. 회사에 제대로 다녀본 적은 없지만 실무를 가장 많이 하는 직급이 과장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간을 떠올리면… 쏟아지는 일을 허덕허덕 해내는, 항상 야근을 하는 과장님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다.
--- p.19~20
한국 사람으로서 굳이 서양산 옻나무의 진액을 먹어야 할까? 우리네 뒷산에 멋쟁이 옻나무가 얼마나 많은데…. 하지만 귀는 팔랑였고, 어느새 구매할 핑계를 찾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매스틱나무 진액을 ‘신이 흘린 눈물’이라고 불렀다 하데. 참 이오니아해 사람들은 문학적이고, 카피를 잘 뽑고, 호들갑이 있고 그걸 읽은 나는… 구매한다.
--- p.39~40
아니 대체 얼마나 잘 죽길래 한 캡슐에 500억 마리나 넣지? 유산균의 먹이가 되어주는 프리바이오틱스를 위한 올리고당 어쩌구까지 읽고 항복했다. 나는 이 세계를 파악하기를 포기합니다. 너무 넓고 깊네요. 그래서 한동안 그냥 행사를 자주 하는 유명한 제품을 사 먹었다. 알아서 잘 만들었겠지 뭐. 그러던 어느 날 그 제약회사 회장 아들이 성범죄를 일으켰다는 뉴스를 보았다.
--- p.52~53
나는 쇼크를 받았다. 인터넷에서 ‘얘들아, 질 유산균은 진짜로 돈고에서 질로 들어가는 거야?’라는 글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리야. 유산균이 장을 통과해서 바깥세상에 나온 다음에 우연의 영역으로 무려 질로 들어가서 활약한다고? 그게 무슨 특전사 요원 임무 수행 같은 얘기야….
--- p.57
하지만 사람의 생각은 바뀐다. 절충이라는 개념은 참 멋지다. 외길이라니. 왜 길을 미리 정하는가. 한 가지 방향을 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한계를 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오만일 수도 있다. 무엇을 알고 정해버리는가. 그건 내가 세상을 볼 때도, 세상이 나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젤리 비타민의 무엇을 알고 그렇게 판단했는가. 쌍길 인생에도, 쌍쌍쌍길 인생에도 진정성은 있을 수 있다.
--- p.76
비행기 안에서 심심함이 극에 달했을 때 하는 행동이 있다. 의자 앞에 있는 두꺼운 기내 면세품 카탈로그를 정독하는 일이다. 이제는 대충 순서도 안다. 처음에는 위스키가 나오고, 그다음에 화장품이 나오고, 상당히 괜찮은 가격으로 보이는 크림 두 개 세트가 나오고(하늘 위에 있으니 싼지 비싼지 알 수가 없다!) 사람들이 대충 선물로 뿌리기 좋은 립밤 3종 세트가 나오고, 목걸이가 나오고, 스카프가 나오고, 만년필이 나오고, 여행용 어댑터가 나오고, 뱅앤올룹슨 이어폰이 나오고, 항공사 마스코트 인형이 나오고 마지막에 반드시 그것이 나온다. 초록홍합.
--- p.81
에스트로겐과 대중의 관계를 돌아볼 때, 2006년에 나왔던 전설의 음료수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를 뻬놓을 수 없을 것이다. 에스트로겐은 석류에 많이 들었고, 그 석류로 음료수를 만들었고, 모델은 이준기고, 시엠송은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로 시작하는데, 이어지는 구절은 심지어 “자꾸자꾸 예뻐지면 나는 어떡해”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한국인들은 열광했고 음료는 출시 한 달 만에 매출 100억 원을 기록했다.
--- p.109
당연히 기운이 별로 없는 언니와 원래 기운이 별로 없는 나와 친구들이 앉아서 진지하게 얘기하게 된 주제는 갑자기 탈모였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언니는 희미한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비오틴이랑 맥주효모를 꼭 같이 먹어야 해.” 언니 왜요…. 하지만 집으로 가는 길에 가족을 위해 맥주효모를 시킨 나였다. 그런 자리에서 나오는 말은 그냥 맞다.
--- p.129
정화수 앞에서 비는 마음이 꼿꼿하고 바른 자세와 함께라면 내가 영양제를 먹는 마음은 침대에 퍼질러 누운 자세와 세트라는 점이 크게 다르긴 한데… 역시 그 점이 영양제의 가장 큰 매력 아닐까!
---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