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만남부터 후광을 비추던 그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의 당당한 태도는 장애를 극복하고 훌륭한 삶을 살 사람이라 믿게 했고, 그의 인생에 저를 보태고 싶어졌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각별하며, 영원하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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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당사자의 가장 큰 적은 사회복지업계 종사자와 가족이라고 합니다. 장애인의 자기 결정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가깝고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편의 자기 결정권에 늘 침범하는 사람이었고, 인생의 여러 선택 앞에 늘 당당하게 제 주장을 우선시하였습니다. 고마운 사람이 되기는커녕, 어느덧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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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엄마를 그렇게 잃었다. 그의 하늘이 무너져 내렸다.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살아간다는 것이 허무했다. 의미 없는 생을 마감하고 싶었지만 자살하기도 힘든 저주 받은 몸뚱이. 극도의 좌절과 분노로 몸을 떨었다. 하루하루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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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겨운 사춘기 시절이기도 했지만, 가난에 허덕이던 호떡집 딸에서, 감사하게도 월급쟁이 사회복지사의 딸로서 살게 되었고 그 덕에 온 나라가 절망에 빠졌던 IMF도 무사히 넘겼다. 자연스럽게 부모님을 따라 오빠들을 따라 나 역시 사회복지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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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 생활하던 장애인이 50cm 높이의 휠체어에 올라앉는 순간, 수직의 세상이 수평으로 펼쳐지며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전동 휠체어가 건강보험 지원 품목에 추가된 2005년부터는 많은 장애인이 수동 휠체어에서 전동 휠체어로 바꿔 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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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휠체어에 앉은 신랑이 입장했다. 은갈치 색 예복을 점잖게 차려입고 당당하게 입장하는 신랑을 보며 하객 모두 인물이 훤하다며 환호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결혼식의 주인공이 신부가 아니라 신랑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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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길 것 많고, 장애물 많은 우리의 여행은 늘 고행길이 된다. 그렇지만 여행이 주는 설렘과 추억은 다시금 여행을 떠나게 한다. 우리와 같은 장애인 여행객이 많아지면서, 국내외 여행지가 다양해지고 항공 서비스가 날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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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체어를 사용하는 남편과의 일상 안에서 어김없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불편함과 억울함으로 인해, 나는 어느새 싸움꾼이 되어 있었다. 핏대를 세우며 장애인 차별이라고 소리치는 나를 오히려 남편이 말릴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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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출산의 과정은 힘들면서도 감격의 연속이었다. 엄마라는 게 행복하고 자랑스러웠다. 그런 나와는 달리, 남편에게는 어두움이 드리워졌다. 우리는 서로 다른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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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야 그때로 돌아가 기억을 더듬으며 남편과 이런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었다. 내가 잊고 있었던 지난 기억, 남편의 희미해진 기억 조각들을 둘이서 함께 맞춰보는 시간을 가지며, 그간 몰랐던 남편의 오랜 괴로움과 처음으로 직면하게 되었다. 남편은 아이를 키우며 느낀 감정을 하나의 단어로 표현했다. ‘구정물’ 같다고. 고여있을 때는 그저 맑은 듯 보이지만, 누군가 흔들어버리면 바닥에 깔려있던 오물들이 다 일어나며 본래대로 혼탁해져 버리는 구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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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결론은 늘 자신의 장애로 귀결되었다. ‘기승전장애’로 끝나버리는 대화. 이렇게 결론이 나면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수가 없다. 그 말을 내뱉는 남편에게도, 듣는 나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다. 장애가 있어도 그리 당당했던 사람이 자꾸만 장애를 거론하는 것이 실망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화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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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연이어 진행되고 있는 지하철 시위.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장애인을 향한 혐오의 목소리가 가득이다. 장애인, 그들도 안다. 당장의 시위로 인해 많은 시민이 불편을 겪는다는 것을, 많은 사람에게 욕을 먹고 혐오의 대상이 될 것임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불편한 자이기에 가장 먼저 나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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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장애인 동료와 일하면서 장애인 근로자들이 겪을 수 있는 직장 내 고충, 비장애인 여성과 살면서 남편이 겪었던 고충. 그들의 이야기를 대신 꺼내어 세상에 들려주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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