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앞으로 서양철학사를 풀어 나가는 방식으로 하이데거의 예처럼 철학자의 삶 자체와 그 속에서 이루어진 철학적 사유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이 한 인간이 특정한 상황에서 행했던 구체적인 활동이기에, 그 내용이 아무리 추상적이라고 해도 철학자는 특정한 시대, 특정 상황 속에서 철학을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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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레스는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원리로 움직이고 사람도 그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불과하다면서, 살아 있으나 죽으나 큰 차이가 없으니,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던 사람이 “그렇다면 당신은 왜 죽지 않습니까?”라고 묻었습니다. 탈레스는 “죽든 살든 큰 차이가 없는데, 굳이 죽음을 재촉하거나 일부러 삶을 떠날 필요가 없지 않은가”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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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은 크게 두 갈래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헤라클레이토스에 뿌리를 둔,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변한다는 ‘변화의 철학(philosophy of change)’이고, 또 하나는 파르메니데스에 뿌리를 둔, 어떤 것도 변하지 않으며 존재와 본질은 영원하다는 ‘본질의 철학(philosophy of essence)’입니다. 그 후 그리스 사람들은 이 두 주장을 어떻게 조화시킬지를 고민하면서 철학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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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리스 문명을 서구 문명의 뿌리라고 말하는 것도 상당 부분은 페리클레스 덕분입니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아테네를 패권국가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지성인과 예술가들을 중용하며 아테네를 문화적으로 융성하게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낙사고라스와의 만남입니다. 아낙사고라스가 멀리 클라조메나이에서, 페르시아 군인으로 그리스에 왔고, 전쟁이 끝난 후에 아테네에 잔류했을 때, 그의 능력을 알아보고 곁에 두었던 사람이 페리클레스였습니다. 그 덕분에 아테네는 철학적으로 큰 자산을 얻게 된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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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크리토스는 지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압데라에서 호의호식하며 사는 길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세상 여러 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압데라에서 동쪽으로 소아시아와 페르시아제국은 물론, 바빌로니아를 지나 인도까지 갔고, 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 이집트까지 두루 돌아다녔는데, 이집트에서는 약 5년간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는 세상을 여행하면서 최고의 지식인과 현자를 만났고, 좋은 책과 자료를 모으는 데에 큰돈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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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가 수사학, 즉 연설의 기술,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고 수업료를 받는 것이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소피스트들이 수사학을 가르치면서, ‘나에게 오면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라고 선전했는데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심지어 죄를 짓고도 법정에서 말을 잘해서, 배심원들을 설득해 무죄가 될 수 있게 하는 기술이 그들이 가르치겠다는 수사학이었습니다.
--- p.106
소크라테스가 ‘정의가 무엇’인지, 묻자 사람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반문에 막혀 제대로 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트라쉬마코스가 못 참겠다는 듯이 나서서, 단도직입적으로 아주 도발적인 주장을 던집니다. “제가 한마디로 딱 잘라 정의해 드리지요. 정의는 강자의 이익입니다.”
--- p.145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왜 탈옥을 거부하면서 자신이 죽기를 기다려 왔고, 또 죽음을 연습했다고 했을까요? 그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요?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죽음이 영혼의 해방이었던 것이지요. 소크라테스는 죽음으로 몸을 빠져나간 영혼이 공중에 흩어져 없어지지 않고, 희멀건해서 생기라곤 하나 없는 허깨비처럼 하데스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영혼은 단단하고 순수하며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자신을 닮은 순수한 존재들만 있는 이데아의 세계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 p.179
플라톤은 아카데미아를 세우고 20년 동안 학문에 매진하고 결사적으로 많은 작품을 써 나갑니다. 특히 이상적인 정치를 그려낸 『국가』가 현실에서는 무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학문적 반성을 토대로 좀 더 현실적인 국가의 청사진을 그립니다.
--- p.204
이소크라테스는 필립포스 2세에게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스를 통합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필립포스 2세는 그의 말을 거역하듯, 무력으로 그리스 도시국가 테베를 공격합니다. 이소크라테스가 화가 나서 단식을 감행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는 100세를 넘겼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소크라테스의 선생님이 소피스트로 유명한 고르기아스입니다. 그도 108세까지 살았으니, 그 선생에 그 제자인 셈입니다.
--- p.218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에 정성을 기울인 것은 수사학을 진정한 철학이라고 했던 이소크라테스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윤리학과 정치학에서 플라톤보다는 이소크라테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 p.241
퓌론(Purrhon, B.C. 360~B.C. 270)은 흔히 회의주의(懷疑主義) 철학자라고 불립니다. 무엇이든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판단을 보류한 채로 일단 의심하고 회의한다는 뜻이겠지요? 제논과 에피쿠로스가 확실한 존재론을 바탕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 가치 있는 삶인지를 적극적으로 제시했다면, 퓌론은 마치 그들에게 “당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요? 당신들 말대로 했다가 그게 아니라면, 그대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건가요? 당신들이 믿고 따르며 행동하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일단 판단을 중지하고 모든 것을 회의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 p.292
금욕주의적 생활 태도를 지키던 제논은 큰 병치레를 하지 않고 아흔여덟 살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매우 충격적입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제논은 스토아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스토아에서 나오던 그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져 발가락이 부러졌다는군요. 그러자 그는 주먹으로 땅바닥을 치면서, 비극작품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답니다. “간다. 운명이여, 왜 나를 소리쳐 부르는가?” 그리고 세상을 떠났는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 p.3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