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 참 멋진 패러독스다. 이 역설이 가능해지려면 무엇보다 삶에 대한 통찰이 심오해야 한다. 삶이 심오할수록 죽음은 한없이 가벼워진다. 그래서인가. 죽음을 대하는 이들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명랑하다! 덕분에 알게 되었다. 심오해야 명랑할 수 있고, 명랑함은 심오함의 원천이라는 것을!
---「책을 열며」중에서
“죽는 법을 배우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과학이며 모든 과학을 초월하는 것임을 그대는 알아야만 한다.” 《오롤로기움 사피엔티아》 14세기
---「Intro」중에서
그는 확신한다. 영혼만으로 존재하는 것이 저승 세계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 저승의 삶을 결정하는 건 영혼의 속성 혹은 영혼의 수준이다. 철학자는 필로소피아(지혜에 대한 사랑)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다시 말해 육신을 멀리하고 영혼과 관련된 사색만을 수행하는 이들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철학은 그 자체로 ‘죽음을 탐구하고 죽음을 연습하는’ 행위인 셈이다.
---「1장 소크라테스, 철학은 죽음의 연습이다」중에서
청년-봄(목), 장년-여름(화), 갱년기(토-환절기), 중년-가을(금)을 거쳐 노년의 겨울(수)에 접어든다. 이것은 우주의 자연스러운 차서다. 그러므로 태어남이 축복이라면 죽음 역시 그러하리라. 청년의 역동성과 장년의 활기가 인생의 클라이맥스라면, 중년의 결실과 노년의 평온함 역시 사계절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다. 죽음은 열매가 씨앗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다. 씨앗은 당연히 봄이 오면 새싹으로 돋아날 것이다. 모든 생은 죽음으로부터 온다는 원리다. 다만 그뿐이다.
---「2장 장자,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히 쉬고 있을 뿐!」중에서
장자나 루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하다.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둘을 날카롭게 갈라놓은 채, 살아서는 집착 때문에 괴로워하고, 죽음 앞에선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린다. 더 놀라운 건 그럼에도 정작 죽음에 대해서는 질문도 하지 않고, 탐색도 하지 않는다. 이분법과 무지, 둘은 찰떡궁합이다.
---「2장 장자, 천지라는 큰 집에서 편히 쉬고 있을 뿐!)
간디에게 죽음은 일상이자 가장 가까운 벗이었다. 정치적 대단식은 그로 하여금 언제나 생사의 기로를 오가게 했다. 숨이 멎기 직전까지 간 적도 많다.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에 항복한 적은 없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영적 수련의 핵심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대로 죽음은 해방이었다. 삶의 모든 짐 혹은 운명이 부여한 다르마에서 벗어나 신의 곁으로 가는 영광스러운 해방. 그런 점에서 그의 죽음은 ‘진리 실험’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아니, 간디라면 좀 다르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사탸그라하에 완결이란 없다. 죽음 또한 그저 한 걸음일 따름이다. 이 세계에서 저 세계로 넘어가는 단 한 걸음!
---「마하트마 간디, 죽음은 영광스러운 해방이다」중에서
‘생명을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것은 볼품없는 짓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일을 다 했고, 이제는 작별을 고할 시간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아하게 떠나겠다.”
---「4장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 한 번의 생으로 충분하다」중에서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불멸을 믿는가?” “아닙니다. 나에게는 한 번의 삶으로 충분합니다.” 그 단 한 번의 생을 마친 시각은 1955년 4월 18일 새벽 1시. 빽빽하게 쓴 방정식의 복잡한 수식들이 그의 곁을 지켰다. 마지막 순간까지 상대성 이론과 양자 역학의 통일을 위해 페달 밟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페달은 계속 어긋났다. 그래도 괜찮다. 어차피 인생도, 과학도 완성이라는 건 없다. 그의 우주론에 따르면, 죽어라고 달려가 봐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지 않는가. 마지막 순간까지 페달을 밟을 수 있었던 인생, 그것으로 충분하다!
---「4장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 한 번의 생으로 충분하다」중에서
연암은 묘비명의 달인이었지만 연암에 대한 묘비명은 없다. 자신은 평생에 걸쳐 묘비명으로 죽은 자를 애도하고 산 자를 위로했는데 정작 그 자신에 대한 묘비명이 없다니. 하지만 그는 별로 애석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애도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일찍부터 수많은 죽음을 겪었고 묘비명을 쓰면서 죽음과 별리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달리 말하면, 늘 ‘오늘 이 하루’의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미 오래전 열하로 가는 길에 ‘명심’을 통해 죽음의 도를 깨우쳤던 그가 아니던가.
---「5장 연암 박지원, 죽음은 도처에 있다」중에서
박식과 깨달음, 부부의 건강, 후손의 탁월함 등에서 부귀영화보다 더 복된 노년이라는 것이다. 맞다. 그런 복된 노년의 정점에서 죽음을 맞이했으니, 죽음 또한 복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암의 유언은 단지 “깨끗하게 목욕시켜 달라”뿐이었다. 다산은 어땠을까. 이미 오래전에 「자찬묘지명」에 덧붙여 「유명첩」을 별도로 작성해 두었다.
---「6장 다산 정약용, 먼 훗날 역사가 증언하리라!」중에서
참 특이하지 않은가. 최후의 작별 인사인데, 죽는다는 표현이 없다. ‘삶에서 풀려나다’, ‘몸을 누이게 되다’, ‘삶의 의지를 놓다’ 등으로 대신한다. 그러니까 붓다와 사리뿟따에게 죽음은 삶의 고단함에서 풀려나는 것이고, 몸을 쉬게 하는 것이며, 삶을 위해 붙들고 있었던 의지를 내려놓는 사건이다. 다시 말해 해방이고 휴식이며 자유다. 이 고별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다시는 오고 감이 없으리니”라는 구절이다. 한마디로 이제 더는 윤회는 없다는 것. 현대인이 상투적으로 쓰는 “다음 생에 또다시 만나자!”, “저세상에선 행복하기를!” 하는 따위의 낭만적인 고별사가 아니다. 스승과 나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라는 것. 이제 인간 세상으로 돌아올 일이 없으니 다시 이런 몸으로 만날 일은 없다는 뜻이다. 열반의 의미가 이런 것일 터, 이것은 죽음 혹은 소멸이 아니다. 생사가 반복되는 윤회의 궤도로부터 탈주하는 도약이다.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있는 우리로서야 상상하기 어려운 경지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죽음의 최고 형식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생사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죽음이라는 관념 자체를 무화시키는 죽음. 불사不死의 경지란 이런 것일까.
---「7장 사리뿟따, 다시는 오고 감이 없으리니!」중에서
고로 이제 다시 태어남은 없다. 태어남이 없으니 죽음 또한 없다. 생사가 없으니 슬픔과 번뇌 또한 없다. 여행을 끝내어 모든 근심에서 벗어났고, 모든 슬픔의 원인에서 헤어났다. 완벽한 소멸, 완전한 자유다! 이미 45년 전에 열반에 이르는 길을 열었고, 이제 신체적 소멸을 통해 그 열반을 온전히 구현해 냈다. 니르바나, 그것은 “인간과 신 모두에게 최고의 목표였으며, 불가해한 고요였으며, 완전히 안전한 피난처”였다.
---「8장 붓다, 용맹정진하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