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에세이 《너, 외롭구나》에는 ‘아름다움’에 관해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소설가 박상륭 선생의 표기에 따르면, ‘아름다움’이란 ‘앓음다움’입니다. ‘앓은 사람답다’는 뜻이 되겠죠. 고통을 앓은, 아픔을 겪은 사람, 고뇌한 사람, 혼돈의 현실 속에서 번민하고 갈등하고 아파한 사람다운 흔적이 느껴지는 것. 그것이 앓음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이랍니다.” 비유하자면 번데기가 누에고치를 힘겹게 뚫고 나오는 과정은 앓음답기에 아름답고, 번데기의 고단한 발버둥이 있기에 날개를 펼친 나비도 아름다운 것이다. 지난날, 정말 수도 없이 우울을 느끼며 삶을 버텨왔다. 힘겹고, 아프고,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면서. 그러나 그렇게 한차례 우울이란 감정이 지나가고 나면, 그 감정을 버티고 인내한 나 자신이 조금은 강인해진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비 온 뒤에 땅이 단단해지듯이. 단단함을 상징하는 다이아몬드는 지하 깊은 곳에서 오랜 시간 엄청난 압력과 열에 저항하며 형성된다. 다이아몬드는 앓음하는 광물이다. 원석 형태의 다이아몬드는 아직 우중충한 빛을 띤다. 또 한 번의 노력과 연마를 거쳐야만 우리가 사랑하는 ‘다이아몬드’가 된다. 찬란한 빛을 내뿜는 아름다움. 이와 마찬가지로, 우울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 안에 내제된 강인함과 가치를 발견하고 어떤 형태로든 성장해나갈 수 있는 것 아닐까? 답답하고, 우울하고, 울적하다는 뜻만 있는 줄 알았던 ‘울’이라는 글자에 화려하고, 찬란하고, 아름답다는 뜻도 있는 것처럼.
--- p.22~23
관찰이란 내가 그릴 대상하고의 온전한 소통의 시간이다.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듣는 것, 즉 경청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상대방에게 진정 어떤 대답을 돌려줄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간혹 상대방이 말하고 있을 때, 내가 다음에 할 말을 신경 쓰느라 제대로 경청하지 않는다. 만약 둘 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내뱉는다면 그건 진정한 소통이 아닐 테다. 그렇기에 상대방의 말을 충분히 듣고 말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릴 때도 그릴 대상을 충분히 관찰하고 그려내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그림에는 ‘재현’과 ‘표현’이 있다. 재현은 눈앞에 있는 어떤 대상을 종이 위에 옮기는 일이다. 표현은 내 안에 있는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서 종이 위에 그리는 일이다. 수강생들 중 무언가를 보고 그리는 것은 잘하는데, 무언가를 보지 않고 그리는 것은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데 잘 안 된다고 어려움을 토로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재현에선 관찰이 중요하지만, 표현에서도 관찰이 중요해요. 재현이 눈앞에 있는 대상을 관찰하는 행위인 데 비해 표현은 그 관찰의 대상이 ‘내 안’에 있을 뿐이죠.” 내 안에 있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생각, 느낌, 기분, 감정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모호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무엇들 말이다. ‘감정’을 예로 들면, 어떠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감정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는데, 그러한 감정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보통 사람들은 우울한 감정이 찾아오면 그저 슬퍼하고 힘들어하고 만다. 혹은 감정을 회피하려고 한다. 감정을 관찰한다는 것은 그 감정을 직시하고 끊임없이 파고들고 분석하려는 노력이다. 내가 왜 우울해졌는지 이유를 찾아보거나 우울이란 감정 안에 얽히고설킨 또 다른 감정들은 무엇이 있는지를 헤집어보는 것.
--- p.55~56
하지만 모두가 피해야 할 인간 유형으로 우울한 사람을 설정한다면, 과연 누가 나서서 우울한 사람을 돌봐줄 것인가. 모두가 기피한다면 그건 너무 잔인한 일이지 않나 싶다. 감정은 계절과도 같다. 돌고 도는 것. 계절이 변하듯 우울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또 다른 감정으로 변할 수 있다. 이 점을 알아야 한다. 현재 우울한 감정에 매몰되어 있거나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감정이 좋은 쪽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 역시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 다만, 사람에 따라 한 감정이 개인에게 머무는 기간은 짧을 수도, 길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이 또한 지나가리라’와 같은 표현, 즉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 현재 우울한 사람이든, 또는 현재 우울한 친구를 곁에 두고 있는 사람이든 말이다. 그럼에도 피해야 할 인간 유형에 매번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들어가는 걸 보다 보면, 사람들이 참 몰인정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당장 우울하거나 부정적인 사람은 대체 누구를 만나야 하는 건가 싶다. 내가 지금 당장 너무 우울한데, 대부분이 나를 기피한다면 씁쓸함을 넘어서 너무나 괴롭지 않을까? 사람들은 우울한 사람이 한없이, 끝없이 우울할 거라고 지나치게 속단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결코, 인간의 자아는 단일하지 않다. 한 개인이 가진 감정은 굉장히 복합적이며 다양하다. 그렇기에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점, 나아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 p.81~82
상대가 힘든 일을 토로한다는 것은, 스스로 풀기 어려운 문제에 도움을 구하는 일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변인이 줄 수 있는 도움은 그 사람이 풀고 있을 객관식 문항에 ‘보기’ 하나를 추가해주는 것이다. 정답을 강요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답이 될 수도 있는 보기를 제공하는 일. 그 안에서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그 사람만의 정답을 찾아내도록 돕고 기다려야 한다. 상대는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설사 상대방이 객관식 문항 보기 중에 선택한 답이 틀릴지라도, 그것 역시 괜찮다. 오답에서 배우며 성장하는 건 인생의 일부니까. 우리는 자신에게서 답을 찾으려는 사람을 마주한다. 내가 건넨 위로가 상대에게 위로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내가 상대방과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필요로 할 것 같은 답을 상대에게 건네기 때문이다. 그 또한 소중한 마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에게 내가 풀던 답대로 해보라며 강요해선 안 된다.
--- p.91
문득 생각했다. 고통으로 새겨진 내 자해 흉터가 그들이 하는 피어싱과 타투와 다를 게 무엇인가? 자랑스럽다고 잘난 척을 할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수치스러움에 꽁꽁 숨길 일만은 아니지 않나? 뮤비 속 여성이 뿜어내던 카리스마를 닮고 싶었다. 커밍아웃한 친구가 느꼈다던 자유를 느끼고 싶었다. 그렇게 손목을 감쌌던 보호대를 벗어 던졌다. 자해 흉터를 감추기 위해 착용했던 스스로의 가식된 장식을. 뿐만 아니라 한여름에도 입었던 긴팔 티셔츠를 벗어 던졌다. 민소매에 가까운 반팔 티를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친구를 만날 때도, 언제 어디서라도. 친구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보고도 아무 말 안 하는 친구, 이게 뭐냐고 묻는 친구, 징그럽다는 친구, 아프지 않았냐고 묻는 친구, 예술 퍼포먼스냐고 묻는 친구, 걱정하는 친구 등등. 어떤 반응을 보여도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나 원래 자해했는데, 이전까지는 숨기고 다녔는데 이제 그냥 드러내고 살려고.”
“부끄럽진 않아?”
“아직 어색하긴 한데, 내가 죄지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뭐 부끄러울 게 있나 싶기도 하고. 그냥 타투한 거라고 봐줘.”
--- p.108
“내가 나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게 나쁜 일인가?”
“그게 너무 지나치다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너는 왠지 내 생각과 말은 틀린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한다고 해야 하나? 그러다 보니 너한테는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어.”
그리고 이어진 친구의 한마디.
“네가 생각하는 너 자신, 네가 생각하는 세상이 전부는 아니야.”
뿌리는 단단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뿌리내리는 일에 심취해 다른 사람을 미처 살피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나에 대해 고민하는 만큼 타인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을까. 뿌리를 깊이 내리느라 정신이 없어 나에 관한 생각에만 꽁꽁 묶여 있었던 건 아닐까. 이 모습은 마치 뿌리만 단단히 내려놓고 열매는커녕 제대로 된 잎사귀도 피우지 못하는 나무 같았다. 나무가 나무다울 때는 가지가 풍성하게 뻗어 있고 계절에 따라 잎이 피고 지며 열매를 맺을 때다. 뿌리만 단단하고 나무통이 잘려 있다면? 나무답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도 이와 비슷하다. 자신만의 견고한 뿌리를 갖추되, 동시에 다양한 사람들과 경험을 공유하며 살아가야 한다. 여러 가지 관점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은 가지를 뻗고 잎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한다. 그제야 비로소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이다.
--- p.151
우리 모두는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에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지나친 생각과 걱정으로 어렸을 적 즐겼던 표현의 자유를 조금씩 잃어간다. 어찌 보면 참으로 씁쓸한 일이다.
“모든 어린아이는 예술가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성장하면서도 여전히 예술가로 남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천재 화가 피카소의 말이다.
이것저것 다 하던 아이는 점점 이것저것 따지기 시작한다. 문법을 고민하다 아무 말 못 하기도 하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시도해보지 못한 채 포기하기도 한다. 종이를 앞에 두고 망설이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 무엇도 시작하기 두려워하는 어른이 되어버린다. 삶은 동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다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때 필요한 것은, 다시 동심으로 돌아가는 일이지 않을까. 자유롭고 거침없던 어린 시절로.
--- p.175~176
약을 제대로 먹기 시작한 뒤부터 삶이 아주 신나지는 않는다.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아닌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롤러코스터가 짜릿하기는 하지만 타고 있으면 그 속도가 너무 빨라 주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회전목마를 타고 있으면 주변이 선명하게 보인다. 아름다운 동화 속 이미지로 꾸며진 놀이공원의 풍경, 알록달록한 조명과 경쾌한 음악 소리, 같이 회전목마를 타는 친구의 표정도 보이고 회전목마를 타지 않았지만 멀리서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사진을 찍어주는 친구도 보인다. 이렇듯 회전목마를 타야지만 느낄 수 있는 낭만이 있다. ‘삶은 재미없지만 그래도 낭만이 있다.’는 정신과 의사 선생님의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까? 물론 한때는 회전목마를 단순히 유치하게만 여긴 적도 있었다. 놀이공원에 가면 무조건 롤러코스터를 타는 순간만 기대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놀이공원의 대미를 장식하는 것은 언제나 회전목마다.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롤러코스터가 아닌 회전목마를 타듯 현재 나의 잔잔한 감정 상태가 굉장히 소중하다는 사실을.
--- p.197~198
Ctrl+Z를 반복하면서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겐 명확하게 룰을 제시한다. 지우개를 쓸 수 없는 펜으로 그리되, 한번 그린 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털선이 아닌 단선으로 남겨두라고. 설령 선이 잘못 그어졌다고 한들, 잘못된 선을 이어서 쭉 그어나가라고 한다. 이렇게 제약이 생기면 선을 제대로 그려야 한다는 마음에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세심하게 관찰하고 미세하게 손의 움직임을 컨트롤해야 한다. 선 하나를 긋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 자꾸만 마음에 들지 않는 선이 그어져, 어설픈 그림이 그려진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렇게 완성된 그림은 완벽하진 않아도, 더 진실되고 솔직한 그림일 수 있다. 꾸며내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담아낸 그림. 그곳에서부터 나아지고, 나아가면 된다.
--- p.207
만약 누군가가 나의 삶을 개연성만으로 평가한다면 5점 만점에 0.5점일 수 있다. 개연성만 따지면 나도 내 삶에 0.5점을 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을 내가 평가할 필요는 없다. 영화감독들이 자신의 작품에 애정을 불어넣듯 내 삶에 애정을 갖고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 중요할 테니 말이다. 어쨌든 내 삶은 내 이야기고, 나는 그 속에 살고 있다.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티탄〉 같은 영화처럼, 인생 또한 개연성 이상의 많은 것들을 품고 있다. 내 삶은 현재 진행 중인 예술 작품이다. 이해할 수 없을 법한 상황들이 반복된다. 종종 이해되지 않는 주변인들이 있지만, 그들과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나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주인공 캐릭터임은 분명하다. 이토록 개연성 따윈 없는, 독특한 삶의 이야기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내 삶의 영화감독인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