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날을 앞둔 2021년 어느 날. “아들, 혹시 이번 어린이날에 받고 싶은 선물 있어?” 여느 또래 아이들이 그러하듯 변신 장난감을 좋아하는 만 다섯 살 아들에게 물었다. (...) “음…… 아빠, 나 이번 어린이날에는 캠핑 가고 싶어!” 캠핑. (...) 아내의 임신을 확인하고부터 캠핑을 쉬어왔으니, 마지막 캠핑을 다녀온 지도 벌써 일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 일상에선 회사 일과 집안일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부모였지만, 캠핑장에서만큼은 아들이 지쳐 잠들 때까지 온 힘을 다해 함께 놀았던 아빠와 엄마였기에 캠핑을 가고 싶어하는 다섯 살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됐다. . (...) 동생의 탄생으로 혹시나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을까 염려했던 지난 두 달간, 첫째로서 또 오빠로서 닥쳐온 변화를 의연하게 받아들여 준 다섯 살에게 이번 어린이날만큼은 행복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어떤 장난감이든 반드시 구해서 안겨주겠다고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는데 ‘캠핑’이라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내와 상의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 아내는 ‘그럼 둘이 다녀오면 되지!’라는 현답을 내어놓았다. 아빠와 아들, 둘만의 캠핑이라……. 고민 끝에 조심스레 아들에게 물었다. “혹시 아빠와 단둘이 가는 캠핑도 괜찮을까?”
--- p.13~14
여느 오토캠핑장과 달리 진짜배기 자연에 둘러싸인 덕유대의 환경은 내가 오롯이 아들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돌멩이 진지 구축, 나뭇가지 칼싸움, 곤충 집짓기 등등, 먹고 마시고 잠자는 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나무, 돌, 흙을 이용한 자연물 놀이에 매진했다. 서로의 호칭은 ‘장군’이었다. “이보게 꼬마 장군, 여기 성벽을 쌓으려면 조금 더 크고 튼튼한 돌이 필요하겠어!” “알았어! 내가 큰 돌을 찾아올게! 아빠 장군은 잘 지키고 있어!” 진지 구축을 마친 뒤에는 돌연 내란이 일어났다. 기다란 나무를 움켜쥔 아들이 눈을 부릅뜨고 이렇게 말했다. “덤벼라, 아빠 장군!” 그렇게 어제의 동료는 오늘의 적군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친구가 되었다.
--- p.18~20
“아빠, 정상까지는 얼마 남았어?” 아이와 함께 산을 좀 다녀본 부모라면 셀 수 없이 들어 봤을 질문. 다섯 살 아들도 다를 바 없다. 정말 궁금해서일 수도 있고 습관처럼 물어보는 것일 수도 있다. 때론 ‘지금 나 힘들어’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을 거다. 아들과 처음 산행을 시작했 을 때만 해도 난 여느 산 사람들과 같이 “거의 다 왔어!”, 금방 도착해!”를 반복하는 거짓말쟁이였다. 하지만 그런 선의의 거짓말이 결코 아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아직 큰 숫자나 미터 또는 킬로미터와 같은 단위를 이해하기엔 어린 아들이지만, 1부터 10까지의 수는 충분히 이해하는 다섯 살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이동해야 하는 전체 거리를 ‘10’으로 전제하고 이동한 거리와 남은 거리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가령, 총 3.2km 구간 중 1km를 이동했다면, “서진아, 10 중에서 3을 지났어. 이제 7만 더 가면 돼!”라고 전달해주는 거다. 다행히도 이와 같은 설명은 다섯 살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 p.96~97
‘텅텅 - 쿵쿵 -’ 굉음에 눈을 번쩍 떴다. 실눈을 뜨고 시간을 확인했다. 자정이 넘었다. 꿈결에 잘못 들은 걸까? 텐트 밖 소리에 귀 기울여 보지만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눈을 감으려는데 이번엔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들렸다. ‘텅터덩 - 쿵 - 쾅 -’불현듯 오늘을 준비하며 찾아 읽었던 글이 떠올랐다. 새벽녘 기온이 떨어지면 온도 변화로 인해 얼음이 팽창하고 수축하면서 응력이 발생해 이런 소리가 날 수 있다는 글이었다. 얼음이 더 단단히 얼어가는 과정인 듯했다. 양쪽 귀로 텐트 밖 얼음 소리를 쫓는 동안 두 눈은 아들을 지그시 바라봤다. 함께 첫 박배낭을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아파트 계단을 오르던 그날이 엊그제 같은데 오늘이 벌써 열다섯 번째 백패킹이다. 성인도 선뜻 따라나서기 힘든 겨울날의 여정,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온 모험이다. 고작 내일모레 여섯 살을 바라보는 아이가 발맞춰 나란히 걸어왔다는 사실이 새삼 고마웠다.
혹시나 차가운 손에 아이가 깰까 봐 주머니 속 핫팩을 한참 주무르던 손바닥으로 발그레해진 아이의 볼을 쓰다듬으며 전했다.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 p.138~139
중학교 1학년과 백패킹을 오는 아빠 백패커라니……. 아니, 아빠와 함께 백패킹을 오는 중학교 1학년이라니! 궁금증이 일었다. 경상북도 김천에서 왔다는 중1의 아빠와 대화를 이어갔다. “아들에게 같이 가자! 하면 군소리 없이 따라나서나요? 제 주변에 초6 아들을 둔 지인이 있는데, 5학년이던 작년까지만 해도 곧잘 다니더니 이젠 여러 날 읍소해야 겨우 한 번 나가준다고 하더라고요.” “주말까지도 학원 수업 일정이 빽빽하게 잡혀 있거든요. 주말도 평일도 없이 학원과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는데, 애들도 쉬어야 하잖아요? 바람도 쐬고 자연도 느끼고. 그래야 또 충전하고 힘내서 수업을 듣죠. 그래서 ‘오늘 하루는 학원 싹 쉬고 백패킹 갈까?’라고 물었더니 바로 따라나섰어요. 음…… 아이 엄마에겐 이제 연락해야 합니다. 오늘 학원 빠진 걸 아직 모르고 있어요. 하하.” 같이 웃었지만, 왠지 마음이 먹먹했다. 우리 집 다섯 살에게도 언젠가 다가올 미래일 테니까. 가족보다 친구가 좋을 때, 집보다 학교와 학원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할 때. 아들과 다녀온 여정을 온라인에 후기 글로 올리면 종종 달리던 댓글이 떠올랐다. ‘저희 아이도 조금 더 어릴 적에 같이 다닐 걸 그랬어요. 이젠 너무 늦었나 봐요. 부모보단 친구가 좋대요.’, ‘그땐 아이가 너무 어린 것 같기도 하고 저는 회사일이 바빠서 조금 더 크면 같이 다녀야지 했는데, 이제 제가 여유가 생기니 아이가 더 바쁘네요.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요.’ 언젠간 우리 아이도 그런 날이 올 테다. 그때까지 더 많이 더 멀리 더 높이, 부지런히 다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 p.149~150
아이와 이런저런 하루일과를 터놓고 주고받는 편한 아빠와 아들 사이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가족과 공유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가지기 위해 매일 저녁 육상선수처럼 내달려 퇴근길에 올랐지만, 세종에서 서울로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아빠에게 아이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절대 시간은 부족했습니다. (...) 하지만 아들이 일곱 살인 지금은 그때와 다릅니다. 아이와 꽤 많은 대화를 나누는 아빠가 되었거든요. 아들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쉬는 시간에 뛰놀다가 넘어진 친구, 점심시간에 김치를 먹지 않는 친구, 며칠째 등교를 하지 못하고 있는 친구 이야기까지, 시시콜콜한 일상을 공유합니다. (...) 아이와 함께 배낭을 메고 자연으로 떠난 덕분입니다.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걷다가 지칠 때면 함께 쉬고 목이 마를 땐 물을 나눠 마시며 서로를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며 걷는 겁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함께 걸어보세요.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