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왜 과학기술 글쓰기를 해야 하는가?
1. 과학기술 글쓰기의 의미
1) 과학기술과 학문적 글쓰기
인간의 삶을 과학기술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있을까? 산업혁명 이후 인간이 보다 편리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술력을 빠르게 발전시켜 왔으며 21세기 현재 인간의 지적 능력을 대신 [혹은 대체]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하기에 이르렀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한계를 보조하는 기계의 역할을 넘어 인간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해 들어오고 있다.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과 인간의 자리가 전도된 세상을 맞닥뜨릴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은데 우리가 인공지능을 포기할 수 있을까? 인공지능을 포함해서 과학기술력의 발전 없는 인류의 미래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과 인간의 공존, 인간에게 유용한 과학기술의 발전의 중요할 텐데 이를 위해서 인류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
일찍이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한 기계에서부터 오늘날 인간의 지능을 대신하는 인공지능을 넘어 미래에도 과학기술은 인류의 존속을 위해서 커다란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한다. 오늘날과학기술 분야의 종사자들은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일반 대중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과학기술의 전공 분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관련 분야의 종사자들과 나누는 것으로는 부족하며 대중들과 함께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 및 IT 기술이 점점 발전함에 따라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서 다양한 기술문화현상을 서술하는 과학기술 글쓰기가 점점 강조되고 있다. 과학기술 분야의 종사자들에게 과학기술과 글쓰기가 결합된 과학기술 글쓰기 능력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기술 글쓰기란 무엇인가? 어떤 대상에 대해 어떠한 방법을 통해서 쓰는 것이 과학기술 글쓰기인가?
우리는 ‘글쓰기’ 하면 직업으로 혹은 취미활동으로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의 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대개의 문학 작품은 우리의 경험을 소재로 하고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해서만들어진다. 그런데 문학 작품에서 언어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 그대로가 아니라 싱징과 은유, 비유, 함축 등의 수사적 기법을 통해서 낯선 언어가 되어 돌아온다. 문학작품에서 ‘경험’ 역시 가공되어 우리들을 현실과 다른 새로운 어떤 세계로 데려다놓는다. 이러한 문학 작품에서의 ‘글쓰기’에 대해 재능이 따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후천적인 노력이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글쓰기는 작가의 전유물은 아니며 쓰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다. 쇼셜 네트워크 서비스(SNS)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지금 글쓰기는 누구나의 일상이 되었다. 현재 우리대학을 비롯해서 국내 대부분의 대학에서 교양교육의 핵심으로서 특별히 글쓰기 능력을 강조하고 있다. 대학, 연구 기관 등의 학문공동체에서 학문적 글쓰기 능력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 학문적 글쓰기는 대체적으로 인문학, 사회과학, 과학기술 글쓰기의 세 영역으로 구분한다. 여기에서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두 영역을 합해서 인문사회 글쓰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과학기술 글쓰기는 주로 이공계의 대학에서 통용되는 글쓰기이다. 우리의 관심 분야가 바로 과학기술 글쓰기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과학기술 글쓰기란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보자. 먼저 과학기술 글쓰기는 과학기술에 관련된 소재를 다루어야 하고 어느 정도 글의 형식 혹은 체재가 정해져 있다. 과학기술 글쓰기는 객관적이고 명시적인 언어를 사용해서 논리를 구축하는 것이 우선이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새롭게 발견한 어떤 사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거나 실험 혹은 연구를 통해서 글쓴이가 새롭게 구축한 논리를 독자에게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다음은 최재천이 쓴 과학기술 에세이 ‘진화는 진보인가?’ 가운데 일부다.
생명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복잡한 생물이 보다 단순한 생물로부터 진화한 것은 사실이나 모든 생물의 구조가 언제나 단순한 데에서 복잡해지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보다 복잡한 생물도 등장한 것이지 결코 모든 생물이 좀 더 복잡하게 변화하는 방향성 같은 게 존재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단세포 생물 중에서도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렇다 할 변화도 겪지 않고 살아남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비교적 최근에 분화된 것들도 있다. 이렇듯 진화에는 방향성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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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자연 선택론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서양인의 자연관은 기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의 Scala Nature, 즉 ‘거대한 존재의 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라는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었다. 거대한 사다리의 저 밑바닥에는 박테리아와 원생동물 등 이른바 단세포 생물이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곤충, 어류, 양서류, 파충류, 포유류가 나오고 드디어 맨 꼭대기에는 인간이 서 있다고 믿었다. 다윈 자신은 원래 ‘미리예정되어 있는 것을 펼쳐 보인다.’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 어 evolvere에서 파생되어 나온 evolution이란 용어의 사용을 꺼려 했다. 대신 그는 “세대 간 돌연변이(transmutation)” 또는 “수정된 상속(descent with modification)”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종의 기원』이 판을 거듭하며 다윈은 결국 너무나 굳어버린 용어인 ‘evolution’을 받아들이지만, 일기에서는 이 세상의 생명체들을 논할 때 “나는 결코 어느 것이 하등하거나 고등하다고 쓰지 않겠다.”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진보라는 말 속에는 목적 또는 목표의 개념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진화에는 목적성이 없다. 만일 진보가 ‘향상’이라는 개념으로 쓰인 것이라면 거의 모든 생물들이 나타내 보이는 적응 현상들은 다 나름대로 예전 상태보다 향상된 상태를 의미한다. 개선이나 효율의 관점에서 진보를 얘기하려면 각각의 생물이 처해 있는 환경 내에서 분석해야 한다. 인간의 지능이라는 잣대에 맞춰 다른 동물들의 능력을 비교할 수는 없다. 어둠 속에서 방향을 잡는 능력을 비교하면 초음파를 보낸 후 그것이 물체에 부딪혀 되돌아오는 것을 분석하는 방법을 개발한 박쥐들이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인간보다 훨씬 진보했다고 평가해야 옳을 일이다. 따라서 진화의 역사에서 객관적인 진보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현대 진화 생물학의 관점이다.(최재천, 2022: 75-77)
최재천은 위의 글을 통해서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1859)이 ‘판을 거듭하면서’ ‘굳어버린’ ‘진보(evolution)’라는 용어에 대한 오해를 풀어내고자 한다. 이른바, 다윈의 핵심 이론인 ‘진화론’에는 원래 생물에 대한 진화의 역사에 대해 어떤 ‘목적성’ 혹은 ‘향상’의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는 것, 다윈은 애써 ‘진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피했다는것, 그런데 “종의기원”이 거듭 발간되고 ‘개선’ 혹은 ‘효율’의 의미를 담고 있는 ‘진보’라는 표현이 사용되면서 진화론에 대해 오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다윈의 ‘진화론’을 ‘적자생존’ 혹은 ‘약육강식’과 관련해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적잖다. 이에 최재천은 현대 진화 생물학은 다윈의 생물 진화의 역사를 생물종의 ‘진보’가 아닌 변화의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의 인용문은 글쓴이 최재천 특유의 감성이나 상상력에 바탕으로 쓰여진 글이 아니다. ‘단세포 생물’, ‘자연 선택’, ‘돌연변이’와 같은 생물학 분야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를 동원하고 객관적이고 명시적인 어휘를 사용해서 진화론에 대해 사실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최재천은 다윈 ‘진화론’이 잘못 이해되고 있는 부분을 바로잡고 독자를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한 어휘를 동원해서 자신의 논리를 세우고 있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문학작품은 일상의 언어를 낯설게 하는 수사적 기교가 필요하다. 그러나 과학기술 글쓰기는 그러한 수사보다 익숙하고 관습적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해서 지시하는 대상과 일대일의 관계로 만나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글은 글쓴이가 의도한 바를 독자에게 쉽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기술 글쓰기에서 수사가 필요하다면 그러한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사용하게 된다.
과학기술 글쓰기는 무엇보다 독자의 눈높이와 함께 매체의 특성을 검토하는 일이 중요하다. 영국에서 발행되고 “Nature”나 미국에서 발행되고 있는 “Science”와 같이 과학기술 전문 분야의 연구자들을 독자로 삼고 있는 학술지라면 관련 분야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고 최신의 연구 동향을 반영하여 시의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발행되고 있는 “ROBOT”나 “과학동아”와 같은 과학 잡지라면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체의 문체를 선택하고 쉬운 언어를 사용해서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좋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시인이 시를 쓰는 과정을 접신(接神) 행위에 비유했다. 플라톤은 좋은 시를 쓰기 위해서 천재적인 영감, 타고한 능력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 경우 글쓰기는 고독한 천재의 개인적인 작업이 된다. 실제로 세계적인 문학 작품이 그렇게 태동했다고 말하지 않은가. 20세기 초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소설을 일례로 들 수 있다. 프루스트는 자신의 침실을 코르크로 막아 바깥 소리가 들리지 않게 하고 커튼을 쳐서 햇빛을 차단했으며, 특별히 외출할 경우 오버코트로 세상과 막을 쳤을 만큼 세상과 절연한 채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대작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과학기술 글쓰기를 비롯한 학문적 글쓰기에서는 천재의 고독한 글쓰기는 오히려 피해야 하는 일이다. 이를 테면 과학기술로 인한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들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도움을 주고받아야 하는 것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