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현대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신석기 혁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문제가 많은 사건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에서는 농경하면서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정착 생활이 시작된 것처럼 설명했지만, 사실은 정착하게되면서 많은 사람을 먹여 살려야 하고 어쩔 수 없이 농경을 시작했다는 정착과 농업의 역전 가설이 있습니다.
--- p.27
고인돌은 전 세계적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나라에 압도적으로 많이 분포합니다. 전 세계 고인돌 약 6만 기 중 3만 기 정도가 우리나라에 있습니다. 전라남도에 있는 고인돌만 해도 1만 9068기입니다. 그것도 띄엄띄엄 있는 것이 아니라 모여있습니다. 그래서 현재는 고인돌이 부족장뿐아니라 부족민들에게도 만들어 준 무덤 기념물이라고 여겨집니다.
--- p.34
사실 마늘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입니다. 우리가 지금 먹는 마늘은 한나라 때에 장건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환웅이 쑥과 마늘을 호랑이와 곰에게 줄 수 있었다는 것은 환웅의 나라가 서쪽으로 중앙아시아부터 동쪽으로 한반도까지 이르는 대제국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 p.44
그럼 고조선의 실제 강역은 어디일까요? 아마도 초기에는 압록강과 요하 사이였을 것입니다. 전국시대 연나라 소왕 대에 진개가 고조선을 쳐서 2000리를 뺏기고, 진나라 때 다시 땅을 뺏겨 청천강 이남만 남게 됩니다. 아마도 이때 고조선의 중심지도 요동에서 평양으로 이동했을 것입니다.
--- p.45
낙랑군이 평양이 아니라 요서에 있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착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낙랑군의 위치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이 맞지만 미천왕 대에 낙랑군과 요동, 현도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였던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을 집요하게 공략해 끝내 수복하면서 313년 낙랑을 병합합니다. 이때 낙랑군은 장통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장통은 1000여 호의 주민을 이끌고 중국 모용외에게 투항합니다. 이에 모용외는 요서 지역에 낙랑군을 만들어 주민을 수용합니다. 즉 요서에 낙랑군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기는 313년 이후입니다.
--- p.72-73
말은 금와왕의 탄생신화에 나오고, 알은 추모왕의 탄생신화에 나옵니다. 이를 미루어 보면 박혁거세는 북쪽에서 기마술과 철기를 가지고 내려온 집단의 우두머리로, 청동기 문화에 머물러 있던 진한 6촌으로 들어와 그들의 지지를 얻어 신라를 건국한 것 같습니다.
--- p.79
새벌은 신라에서만 쓰던 말이 아닙니다. 백제의 수도였던 ‘사비’는 신라 문무왕 대에 ‘소부리’로 불리는데 둘 다 ‘새벌’입니다. 궁예의 후고구려의 수도였던 ‘철원’도 鐵-쇠, 原-벌이니 ‘쇠벌’입니다. 이 말은 현재까지도 전해져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새’는 ‘새롭다’ 혹은 ‘처음’이라는 뜻인 것 같습니다만, ‘새’가 ‘처음’이 아니라 ‘첫 번째’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서울은 ‘첫 번째 도시’ 혹은 ‘으뜸가는 도시’라는 뜻이 되고, 한자로 바꾸면 ‘수도’입니다.
--- p.80
고구려의 역사는 추모로부터 시작해서 보장왕까지 약 700년입니다. 그런데 중국의 사서에는 900년이라는 기록이 가끔 나옵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고구려 왕가의 성이 해씨에서 고씨로 바뀐다는 점입니다.
--- p.81
고구려는 고리, 고려, 구려 등이 지금의 ‘고을’에 해당하는 단어에 고를 붙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5세기 장수왕 대에 고구려 대신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합니다. 하지만 고(高)가 묘하게도 고구려의 왕실 성인 고(高)와 같고, 후에 왕(王)씨의 고려와 구별하기 위해서 역사책에서는 고구려라고 사용합니다.
--- p.83
고구려는 수도를 두 군데에 짓습니다. 평시에는 평지성이 수도의 역할을 하다가, 전쟁이 나고 수도가 함락되면 산성에서 농성하였습니다. 최초의 수도인 졸본은 현재 오녀산성입니다. 그렇다면 평지성도 있을 텐데 정확한 위치는 오리무중입니다. 유리왕 대에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깁니다.
--- p.83-84
비류는 미추홀을 수도로 정해 나라를 세우고, 온조는 한강 이북에 수도를 정하고 십제라는 나라를 세웁니다. 그런데 미추홀은 토지에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생활이 불편하다고 하여 백성들이 위례성으로 가버립니다. 비류는 자괴감이 들어 괴로워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온조는 비류의 백성을 받아들인 후 나라의 이름을 백제로 바꾸고 마한을 병합해 백제를 큰 나라로 성장시킵니다.
--- p.91
시호는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올리는 칭호이며, 묘호는 왕의 일생을 평가하여 정하며, 태묘(중국)/종묘(우리나라)에서 부르는 호칭입니다. 조선의 4대 왕의 경우 시호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고 묘호는 세종입니다.
--- p.99
신라의 1대 군주는 거서간, 2대 군주는 차차웅, 3대부터 16대까지는 이사금이라 불렀습니다. 석탈해가 신라의 4대 군주이고 마지막 석씨 군주가 16대 흘해 이사금이니 이사금은 신라의 석씨 군주를 부르는 명칭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서간은 지배자, 차차웅은 무당, 이사금은 연장자라는 의미입니다.
--- p.101
고국천왕은 194년 봄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양곡을 대여해 주고 수확기인 10월 쯤에 낮은 이자를 쳐 갚게 하는 진대법이라는 복지제도를 실시합니다. 진대법은 한국사 최초의 복지제도로 고려의 흑창, 조선의 의창, 환곡, 사창 등으로 이어집니다.
--- p.104
내물 마립간은 신라의 두 번째 김씨 왕이며, 최초의 마립간입니다. 하지만 필자는 신라라는 나라의 첫 왕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내물 마립간 이전에는 지금의 경주를 중심으로 한 나라를 사로국이라고 했고, 처음에는 박씨, 나중에는 석씨가 다스렸습니다. 3세기 중반 김씨들이 사로국 지역에 터를 잡고 새 왕조를 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은 주위의 다른 나라는 물론이요,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도 커다란 반발을 불러옵니다. 이럴 경우 자주 사용하는 방법은 이전 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이전 나라의 국호를 그대로 쓰는 것입니다.
--- p.131
우리나라에서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왕은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조선 세종대왕입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는 등 문치를 통해 대왕의 칭호를 얻었다면, 광개토대왕은 이름 그대로 땅을 크게 넓힌 무치를 통해 대왕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광개토 대왕은 우리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중국을 공격하여 땅을 넓힌 것이 아닙니다. 평양 이남 한반도를 공격하여 땅을 넓혔습니다. 중국을 공격한 왕은 고구려 태조왕과 발해 무왕 등이 있습니다.
--- p.138
사비성이 함락되자 삼천궁녀가 낙화암에 떨어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폭군 연산군이 긁어모은 궁녀도 1000명을 살짝 넘는 수준에 불과합니다. 영토도 적고, 인구는 훨씬 적은 800년 전의 백제에 궁녀를 3000명이나 모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의자왕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입니다.
--- p.211-212
장보고의 본명은 이두로 궁복 또는 궁파입니다. 궁은 활이니 아마 활을 잘 쏘아서 ‘활보’라고 불린 것 같습니다. 나중에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는 것으로 보아 완도 사람일 가능성이 크며, 출신을 알 수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가문은 5두품 이하였을 것입니다.
--- p.253
고려는 성별에 따라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호적에는 남녀 관계없이 태어난 순서대로 적었고 재산을 상속할 때도 아들과 딸이 균등하게 나눠 가졌습니다. 혼인 제도는 일부일처제였으며 대체로 신랑이 신붓집에 가서 결혼식을 치르고, 신부의 집에 살았습니다. 정말로 장가(杖家, 장인·장모의 집)를 갔습니다. 고려에서는 부부가 평등한 관계로 각각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였고, 부부가 모두 이혼을 요구할 수 있었고, 남녀 모두 당연히 재혼할 수 있었습니다. 고려의 여성은 남편이 죽으면 호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 p.277
6월 6일은 현충일입니다. 6월 25일이 한국전쟁 개시일이기 때문에 현충일이 생겼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이유 중 하나이지만, 고려때부터 24절기의 하나인 ‘망종’에 전사한 장병들에게 제사를 지냈던 전통을 고려한 것이기도 합니다.
--- p.307
몽골군은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버티고 있던 충주성을 무려 70일간이나 공격합니다. 결국 충주성은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도 저하됩니다. 그러자 김윤후는 관청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사력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라고 격려하며 사기를 끌어 올립니다. 결국 몽골군은 퇴각하였고 충주성 사람들은 관노나 백정부터 일반 백성까지 모두 벼슬을 받았으며 김윤후도 감문위 상장군으로 임명됩니다.
--- p.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