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체라는 개념은 철학적 사유에서 고대로부터 연원해 온 아주 오래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실체라는 말을, 어떤 사물이 그것의 본성을 바꿔놓지 않는 어떤 변화를 겪게 될 때 그 변하지 않는 측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해 왔다. 예컨대, 벽은 실체일 것이고, 그 위에 칠해진 하얗거나 푸른 빛 색깔은 이 실체의 본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갓 비본질적인 변화에 -즉 우연적인 것에- 불과할 것이다. 어떤 새로운 색깔의 층이 덧입혀지든 벽은 벽인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예를 들자면, 물이라는 실체는, 그것이 액체로 변하든 아니면 고체로 얼어붙든, 물인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연 속에는 다수의 실체들이 존재한다. 나무, 바위, 사람 등은 제각기 모두 서로 다른 실체들이다. 신은 이들 중에서 제일 원인이 되는 실체이다.
데카르트에 따르면, 오로지 두 가지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연장(물질)과 사유가 그들로서, 이들은 신이 항구적으로 창조하는 것들이다(데카르트의 연속창조론). 이것이 데카르트의 이원론이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오로지 단 하나의 실체만이 존재한다. 이 단 하나의 실체란 신, 혹은, 그에 따르면, 자연 전체로서, 이것은 언젠가 창조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자기 자신으로 충분한 어떤 것이다. 이것이 스피노자의 일원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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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편견이 생겨나는 기본 이유는, 사람들이 사물들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른 채 태어났으면서도, 그렇지만 자신들에게 유용한 것을 욕구에 가득 차서 자신들이 좇고 있다는 그 사실만은 그들 모두가 잘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잘 의식하고 있지만, 그들로 하여금 그런 것을 원하도록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는 모르는 채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또한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에게 유용한 것을 가져다주는 어떤 목적을 위해 활동하기 때문에, 자연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목적-원인을 끊임없이 찾아내려 한다.
이리하여 누군가 그들에게 이러한 목적-원인 같은 것을 주게 되면, 그들은 좋아하는 것이다.만약 누군가 그들에게 목적-원인 같은 것을 주는 이가 없다면, 그들은 그들 자신을 습관적으로 부추기는 목적을 끌어들이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성향에 따라서 다른 이의 성향을 판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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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같은 이들은 또한 동물들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동물들이 예사롭지 않은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들 자신들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자연의 역량이 이처럼 순전히 자기 자신에 의해서 우리에게 그토록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간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성취들도 역시 마찬가지로 이러한 자연의 역량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터무니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만약 인간들이 그들의 신체와 그 변양들의 주인이라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최대의 이익을 위하여 그들의 입을 다물 수도 있을 텐데도 그렇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리하여 그들 사이에 최대의 불화를 만들어 내고 만다는 것을 경험은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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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들이 우리를 변양시키는 기본적인 방식의 종류가 세 가지이므로, 그에 따라 기본적인 감정들의 종류 또한 세 가지이다. 기쁨, 슬픔, 그리고 욕망이다. 또한 이 기본적인 감정들이 서로 섞이어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감정들의 종류(영혼의 오락가락)가 있고, 그리하여 이들로부터 파생되어 나오는 감정들의 종류가 있다. 사랑, 미움, 두려움, 희망 등등이 그들이다. 이 모든 종류의 감정들이 수동적인 것들이다. 즉 이것들은, 우리의 뜻과는 상관없이, 우리의 신체가 외부 물체와 접촉하게 될 때 생겨나는 것들이다.
게다가 이 수동적인 것들은 또한 부적합한 관념들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에게 이 수동적인 것들을 일으키는 외부 대상들의 정확한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대상들이 나의 신체에 일으키는 정확한 결과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수동적인 것들은 한편으로는 확실히 나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들은 또한 다른 한편으로는 외부 대상의 본성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외부 대상 A와의 접촉에서 생겨나는 기쁨에는 이 대상 A의 개별적인 본성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러므로 이 기쁨은 대상 B로부터 생겨나는 기쁨과는 다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슬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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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것이 우리 자신에게 좋다거나 나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더라도, 이러한 기쁨의 감정이나 슬픔의 감정으로부터 나오게 되는 욕망은, 이 감정들보다 더 강한 다른 감정들에 의해 억압될 수 있다. 무엇이 좋은 것이고 무엇이 나쁜 것인지를 참되게 인식하고 있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다른 감정들이 자신들의 더 강한 힘을 받아들이게 하여 보다 화급한 욕망이 생겨나게 하는 것을 이러한 인식이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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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은 자연에 맞서려 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성이 요구하는 것은 각자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자기 자신에게 유용한 것을, 즉 자기 자신에게 정말로 유용한 것을 찾으라는 것이고, 인간을 보다 더 큰 완전성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소망하라는 것이며 그리고, 절대적으로 말하건대, 각자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것이 내가 덕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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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감정의 크기는 그것의 원인의 힘이 그것을 겪는 주체의 본성과 비교되어 판단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감정이 같은 주체 내에서도 더 크거나 더 작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본성을 가진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서도 더 크거나 더 작을 수 있다.
정신의 역량은 인식에 있고 그것의 무능력은 인식의 결여에 있는 것이므로, 그것의 역량이 가장 강한 정신, 즉 수동적인 것에 가장 적게 예속되어 있는 정신이란, 그것의 가장 큰 부분이 적합한 관념들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정신이다. 또한 유념해야 할 것은 정신적인 고통들은 일반적으로, 언제든 변화 중에 있으며 그러므로 우리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어떤 대상에 대한 과도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실로 어느 누구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인해 고통받게 되지는 않으며, 적대감이나 음모란 모두가 동시에 소유할 수는 없는 어떤 사랑의 대상과 관련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명석하고 판명한 관념들이 감정들에 대항하여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신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기반으로 하는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실로 이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은 수동적인 것들인 감정들을 완전히 다 없애버리지는 못할지라도, 하여간 이 감정들이 정신의 가장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도록 할 수는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 세 번째 종류의 인식은 불변적이고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랑을 낳는 것인데, 이 사랑은 사랑이라는 것에 습관적으로 따라붙게 되는 고통 없이 모두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정신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커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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