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를 잘해야 돈도 많이 벌어. 너 공부 못했던 사람치고 돈 잘 버는 사람 봤니? 그러니까 공부 좀 하라고!”
이건 엄마가 나만 보면 불러 대는 노래와 같다. 특히 새 학기가 되면 ‘특별 잔소리 이벤트’라도 하는 것처럼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내 귀에 딱지처럼 붙어 버렸다.
‘결국 돈이었어!’
--- p. 9
‘흐흐흐흐. 그럼 심부름 천 원, 쓰레기 버리는 건 좀 더러우니까 천오백 원 그리고 안마하기는…… 그래, 요것도 천 원 받자.’
자꾸만 입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가격까지 매기다 보니 금방이라도 돈을 많이 벌 것 같았다. 마음이 금세 부풀었다. 당장이라도 실행에 옮기고 싶어졌다.
--- p. 22
나는 살짝 화가 나 있는 할머니의 양어깨를 안마하기 시작했다. 주물럭주물럭 정성을 다하여 우리 할머니 어깨 주무르듯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좀 전에 버럭 화냈던 건 잊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아이고! 시원하다. 아니, 어린애 손이 어째 이리 야물대?”
그제야 조마조마했던 나도 안심이 됐다. 일단 서비스 하나는 통과한 셈이었다.
--- p. 31
“진짜 이상한데? 놀자고 하면 맨날 바쁘다고 하고. 너 요즘 완전 짜증 나.”
용준이도 그간 참고 있었다는 듯 구시렁댔다. 그러고 보니 진짜 돈 벌겠다고 한 이후로 석훈이와 용준이랑 제대로 놀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용준이와 석훈이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가 없었다.
“미안! 나중에 내가 다 갚을게.”
“갚긴 뭘 갚아? 못 놀면 땡이지. 가자, 용준아!”
석훈이가 코웃음 치며 용준이와 밖으로 나갔다.
--- p. 75
할머니가 떠난 후 돈을 쥐고 있는 내 손을 봤다.
‘히히히. 드디어 이만 원을 벌었군.’
저번에 오천 원 번 거하고는 차원이 달랐다. 만 원짜리 두 장을 손에 쥐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으흐흐. 역시 돈은 좋은 거구나.’
진심으로 좋았다. 엄마가 돈, 돈, 돈,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돈이 내 손에 있을 때 세상 무서울 것도 부러울 것도 없는 것 같았다. 이래서 돈을 많이 벌어야 하나 보다.
‘잘하고 있어, 이재원! 계속해 보는 거야.’
--- p. 83
석훈이는 화를 버럭 내며 내 팔을 뗐다. 이미 두 볼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래”
“다 필요 없어. 저리 꺼지라고.”
석훈이는 좀 전과 같이 소리를 버럭 지르더니 냅다 뛰기 시작했다. 기껏 붙잡았는데 또 뛰니까 한편으로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됐다.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있다간 정말이지 석훈이와 사이가 더 멀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p. 126
없다. 없다. 없다!
여길 봐도 없고, 저길 봐도 없다.
나는 그동안 어떻게 산 거지?
“하아.”
방바닥이 꺼질 정도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는 널브러져 있는 텅 빈 지갑과 돼지 저금통을 째려봤다. 애꿎은 지갑과 저금통이 내게 화풀이를 당하고 있었다. 사실 지갑이나 저금통을 째려볼 일이 아니었다. 돈이 생겼다고 흥청망청 써 댄 나 자신을 째려봐야 했다.
--- p.7
사실 돈이 있을 땐 딱히 쓰고 싶지 않다. 그냥 지갑에 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힘이 된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걸 살 수 있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버스가 정류장을 쌩 지나간 것처럼 지갑을 스쳐 간 돈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생일대의 첫사랑, 사랑이의 생일이 코앞인데도 선물 살 돈이 없어 쩔쩔매고 있다.
--- pp.10~12
나는 어쩌자고 그간 모아 뒀던 돈을 다 써 버린 걸까.
‘휴! 엄마와의 내기에서 이기겠다고 악착같이 벌어 놓으면 뭐 하나? 내일이 없는 것처럼 흥청망청 쓰더니 꼴좋다.’
이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삐죽 솟았다.
“으아!”
나도 모르게 괴성이 흘러나왔다. 오늘이야말로 내 인생 최대 흑역사의 날이 될 것 같다.
--- pp.20~21
“저기, 제가 할게요!”
“응? 뭘?”
나는 에두르지 않고 원하는 걸 바로 이야기했다.
“매리 산책이요. 제가 시킬게요.”
할머니가 눈을 껌뻑거렸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가 매리 산책을 시키겠다고?”
“네. 제가 책임지고 시킬게요.”
“그려? 그거 잘됐다. 네가 오늘처럼 해 준다면야 더 바랄 게 없지. 내가 알바비는 톡톡히 쳐 주마.”
--- pp.37~38
구원처럼 찾아온 알바는 첫날부터 고난이 이어졌다. 그래도 엄마에게는 펫 시터 알바를 시작했다고 말하지 않았다. 물론 석훈이와 용준이한테도 말하지 않았다. 이 일은 끝까지 비밀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영원히 들통나지 않는 비밀은 없는 모양이다. 아무리 입단속을 철저히 해도 알려질 비밀은 알려지는 게 운명일까?
--- p.46
도대체 왜 이렇게 피곤한 걸까?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음식 씹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일과가 빡빡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하기야 돌이켜 보면 오늘 일이 많았다. 펫 시터 알바뿐만 아니라 가방을 정자에 두고 와서 다시 공원에 돌아가고 학원에 남아서 문제 풀고…….
오늘 벌어진 일을 떠올리니 밥을 먹겠다고 식탁에 앉아 있는 것도 용했다.
‘그나저나 내일도 이렇게 피곤하면 어떡하지? 아냐. 오늘처럼 정신 줄만 놓지 않으면 될 거야. 그러니 오늘만 꾹 참고 내일부턴 다시 잘하는 거다!’
--- p.50
운동장으로 나가자마자 경기가 시작됐다. 역시 승우의 활약이 대단했다. 축구하는 내내 선수처럼 자유롭게운동장을 누비는 승우가 너무나 멋져 보였다. 축구를 잘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잘하는지는 몰랐다. 종횡무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마치 혼자서 운동장을 지배하는 것처럼 대활약을 펼쳤다.
“와! 승우, 너 진짜 축구 잘한다. 비결이 뭐야?”
“매일 연습하니까 그렇지.”
“매일 연습해? 언제?”
“아빠랑 매일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한 시간 동안 운동하고 학교에 와. 벌써 1년 됐어.”
--- p.54
‘으아. 진짜 일어나기 싫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제 고작 사흘째인데 엄살 부리는 거 아니야?’
‘오늘은 토요일이잖아? 꼭 토요일까지 해야 하나?’
‘그래. 승우는 운동선수가 꿈이라지만 난 그런 건 아니잖아.’
‘아프다고 할까? 그래서 다음에 한다고.’
오늘따라 알람 소리가 요란하다 싶더니 마음의 소리도 못지않았다. 온갖 핑곗거리와 변명이 한꺼번에 밀려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어째 몸도 좀 이상한 것 같았다.
--- p.91
나도 매일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다고 말하려다 말았다. 괜히 잘난 척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몰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기분은 좋았다. 아마 이불 개는 일만큼 사소한 일은 없을 거다. 그런데도 그 일을 꾸준히 해 온 내가 엄청 대단한 일을 해낸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의 습관이 곧 나를 말하는 겁니다.’
--- p.133
“덤벙대지 말고 조심히…….”
쿵. 뒤통수를 쫓아오던 잔소리가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묻혔다. 나는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엄마의 잔소리는 죽지 않았다. 아니, 죽었다 싶으면 다시 살아났다. 잔소리 좀비처럼 말이다. 그래도 요즘은 잔소리가 전보다 많이 줄었다. 그게 다 내가 개과천선…… 아니, 좋은 습관을 들여서다.
--- p.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