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티 마을에 가면 허물어진 담장 사이로 노란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는 집을 볼 수 있지요.
--- 본문 중에서
큰돌이는 팔베개를 하고 벌렁 누웠습니다. 파란 하늘에 솜구름이 두둥실 떠 있습니다. 구름 속에 숨어 있던 해가 나오자 큰돌이는 눈이 부셔 두 눈을 감았어요.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어요. 환히 웃던 엄마 얼굴, 포근하던 엄마 품속, 목욕을 시켜 주던 손길……. 말썽을 피워 혼나던 일까지도 그리웠습니다.
--- p.34
방 안에서 신발을 신고 팔짝팔짝 뛰던 영미가 팽그르르 맴을 돌았어요. 할아버지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큰돌이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어요. 샘이 나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 pp.40-41
큰돌이는 꽃이 져 하얀 깃털을 달고 있는 민들레를 꺾었어요. 후, 하고 불자 민들레 씨앗이 솜털 낙하산을 타고 두둥실 날아갔어요. 큰돌이는 뿔뿔이 헤어져 살고 있는 자기네 가족이 영락없이 민들레 꽃씨처럼 보였어요. 그 씨앗들은 내년에 또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 p.67
영미는 찔레 순을 맛보고 싶어졌어요. 오빠와 함께 먹던 때를 생각하면서요. 영미는 장미 순을 향해 손을 뻗었어요. “아야!” 영미는 오빠처럼 가시에 손등을 찔렸어요. ‘오빠도 이렇게 아팠겠구나.’ 아픈 것보다 그 생각이 먼저 떠올랐어요.
--- p.78
“큰돌아, 얼른 나와서 밥 먹어라.” 아줌마가 밖에서 말했습니다. ‘난 절대로 엄마라고 안 부를 거야. 꼭 팥쥐 엄마같이 생겨 갖곤.’ 큰돌이는 마음속으로 꼭꼭 다짐했어요.
--- p.91
큰돌이는 신기해하며 아빠를 보았어요. 아빠 얼굴이 저렇게 환히 빛날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큰돌이는 아빠가 변한 게 지금까지 팥쥐 엄마 때문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일할 때 표정을 보니 아빠 스스로도 바뀌어 가는 것 같았어요.
--- p.102
정말 신기한 일이었어요. 팥쥐 엄마 손만 닿으면 아무리 낡고 허름한 물건도 다시 쓸 만한 것으로 변하니 말이에요. 팥쥐 엄마의 어느 구석에 그런 재주가 숨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 p.104
영미의 보물 상자엔 학용품뿐 아니라 비누, 칫솔, 아빠 면도기, 엄마가 먹고 남은 감기약 같은 것들도 담기기 시작했어요. 오빠 생각을 하면 할아버지와 아빠도 저절로 떠올랐거든요. 감기약을 먹으면 할아버지 기침도 나을 거예요.
--- p.114
꼭 데리러 오겠다는 엄마도 잊고, 하나뿐인 동생도 잊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걸까요. 그렇게 사는 게 잘하는 걸까요. 큰돌이는 새 방에 누워서 생각에 잠겼어요. 팥쥐 엄마가 처음처럼 밉지 않은 것도 은근히 걱정되었어요.
--- pp.121-122
팥쥐 엄마는 아무런 대답 없이 큰돌이 얼굴을 가만가만히 닦았습니다. 하지만 큰돌이는 팥쥐 엄마가 마음속으로 하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어요. 팥쥐 엄마 얼굴에 물살처럼 번지는 미소를 볼 수 있었거든요.
--- p.150
밤티 마을에 가면 가을 햇살에 지붕이 반짝반짝 빛나는 집이 있어요.
--- 본문 중에서
“비누 향이 참 좋구나!” 팥쥐 엄마가 세숫비누 냄새를 킁킁 맡았어요. ‘그 비누, 엄마가 쓰세요.’ 그 말은 큰돌이 마음속에서만 맴돌 뿐이었어요.
--- p.14
영미는 땅바닥에 낙서를 하며 모르는 척했어요. 아이들이 삐삐 같다느니, 도깨비 뿔 같다느니 하며 머리 모양을 놀릴 때보다 더 창피했어요. 얼굴에 수두 흉터가 가득한 팥쥐 엄마가 자기 엄마라는 사실이요.
--- p.21
“국 맛있으니까 다 먹고 더 받으러 와.” 팥쥐 엄마가 걸걸한 목소리에 어울리지 않게 속삭였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왜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는지 모르겠어요. 큰돌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식판을 들고 돌아섰어요.
--- pp.37~38
순간, 큰돌이는 팥쥐 엄마가 참 예뻐 보였어요. 팥쥐 엄마 얼굴에 엄마 얼굴이 겹쳐 떠올랐어요. 왜 이제야 온 건지, 왜 좀 더 빨리 오지 않았는지 큰돌이는 슬며시 엄마가 원망스러워졌습니다.
--- p.74
“참, 팥쥐 엄마는 이름이 뭐야?” 영미는 대답 대신 엉뚱한 걸 물었어요. “여태 몰랐냐? 정, 옥 자, 순 자, 정옥순 씨잖아.” 큰돌이가 어이없어했어요. “말해 준 사람도 없었잖아. 어떤 엄마가 더 좋은지 잘 모르겠어. 은선 엄마하고 옥순 엄마 중에 누가 더 좋으냐고 물으면 말할 수 있는데.”
--- pp.81~82
“으앙!” 갑자기 영미가 두 다리를 쭉 뻗더니 울음을 터뜨렸어요. 팥쥐 엄마가 깜짝 놀라 쫓아 들어왔어요. “왜 맨날 나만 가라고 해? 나도 밤티 마을 집이 좋단 말이야. 그런데 왜 나만 미워하냐고.” 영미가 서럽게 울면서 말했습니다.
--- pp.88~89
팥쥐 엄마 품에 안긴 영미가 투정 부리듯 말했어요. “다 오빠만 좋아해. 사람들도 다 큰돌이 아빠, 큰돌이 할아버지라고 부르고. 우리 집도 큰돌이네 집이라고 하잖아.” 큰돌이는 웃음이 나왔어요. 아빠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습니다. “그래, 이제부터 영미네 집 해라, 영미네 집 해.” 큰돌이는 큰 목소리로 말했어요. 그렇게 하면 다시는 영미가 떠날 일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 p.89
큰돌이는 팥쥐 엄마가 처음 왔던 날이 생각났어요. 누군가 마당을 말끔히 쓸었는데 꽃도 진 민들레들은 그냥 놓아두었지요. 큰돌이는 그때부터 팥쥐 엄마 마음이 곱다는 걸 알았어요. 민들레 꽃씨처럼 외롭게 떠돌며 살아온 팥쥐 엄마는 또다시 어디로 간 걸까요.
--- p.91
“영미야, 우리 하는 데까지 해 보자.” 팥쥐 엄마는 영미를 꼭 끌어안고 새빨개진 얼굴로 계속해서 뛰었어요. 다른 아이들이 모두 결승선을 넘은 뒤에도 팥쥐 엄마는 멈추지 않았어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앙다문 채 앞만 바라보며 뛰었어요. 팥쥐 엄마의 거친 숨소리가 영미 가슴속에서 울려 퍼졌습니다.
--- p.109
밤티 마을에 가면 담장 너머로 떠들썩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집이 있어요.
--- 본문 중에서
팥쥐 엄마는 딸을 낳았어요. 거기까진 정말 좋았지요. 영미도 여동생을 바랐으니까요. 그런데 봄이가 가족의 사랑을 모두 다 가져가 버린 거예요. 이제 아무도 영미에겐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 p.15
어른들 말에 영미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부글거렸어요.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영미에게 제대로 사과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치, 내 걱정보다는 봄이 돌잔치 망치지 않은 게
더 먼저인 거야.’ 영미 마음은 더 꽁해졌어요.
--- p.26
“난 그전에 쑥골 할머니네 집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엄청 부러웠어. 그런데 요새 우리 집이 그래. 저녁마다 봄이 보면서 다 같이 웃잖아. 그럴 때면 막 행복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봄이가 더 좋아.”
--- p.50
“봄이 키우면서 그런 생각 많이 한다. 우리 영미 아기 때는 어땠을까? 우리 영미도 요렇게 예쁜 아기였겠지. 봄이가 있어도 나한테는 영미 네가 첫딸이야. 봄이보다 널 먼저 만났으니까…….” 등을 타고 들려오는 팥쥐 엄마 목소리가 영미 가슴속으로 흘러들었어요. 영미는 팥쥐 엄마 등에 살며시 뺨을 대었어요.
--- pp.56-57
영미는 아빠가 봄이를 끌어안고 뺨을 비비던 모습이 생각났어요. 봄이가 아프다는 걸 알면 당장 달려올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전처럼 샘나지는 않았어요. 영미는 언니니까요.
--- p.65
고추가 빨갛게 익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큰돌이와 영미는 아침마다 밭에 가서 빨간 고추를 땄어요.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었어요. 아침 먹기 전에 혼자 밭에 가서 고추를 따 온 큰돌이를 보고 다음 날부터 영미도 함께 갔어요.
--- p.83
“밭에 고추가 주렁주렁 달린 걸 보면, 저게 다 돈이지 싶어 기운이 부쩍부쩍 솟는걸. 나도 거실 널찍하고, 수도꼭지만 틀면 뜨신 물 콸콸 나오는 새 집에서 좀 살아 보고 싶어. 애들한테도 방 하나씩 주고. 내년엔 봄이도 더 크니까 좀 나아질 거야.”
--- p.88
늘 씩씩하던 엄마가 아이처럼 소리 내어 울다니요. 고추 농사를 망치면 컴퓨터를 살 수 없겠지요. 어젯밤만 해도 컴퓨터가 생기는 꿈에 부풀어 잠이 들었는데 그만 그 꿈이 비바람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큰돌이는 벽에 기댄 채 쪼그려 앉았습니다.
--- p.98
“아버지는 애 하나도 제대로 못 보고 뭐 하셨대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쩔 뻔했어요?” 아빠가 할아버지에게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할아버지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물을 글썽였어요.
--- pp.113-114
“태풍 덕분에 정신이 들었어요. 새 집 짓고, 내 땅 갖는 게 꿈이긴 했지만 식구들하고 동네 사람들한테 인정받고 싶은 욕심도 있었던 것 같아요. 고추 농사 망쳤어도 이젠 속 안 아파요. 가족에게 아무 일없는데 그깟 한 해 농사 망친 게 무슨 대수라고요.”
--- p.129
영미의 발표를 듣는 팥쥐 엄마 눈가가 붉어졌어요. 아빠는 영미를 자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어요. 할아버지도 함박웃음을 지었고요. 큰돌이는 영미에게 엄지를 척 들어 보였지요.
--- p.134
마리네 집 위층에 드디어 새로운 사람들이 이사를 오는 날입니다.
--- 본문 중에서
마리는 한국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여느 한국 아이들과 다를 게 없지요. 그런데 마리가 네팔 사람인 걸 알면 아이들은 갑자기 달라졌어요. 놀리거나 신기해하는 것도 싫었지만 더 친절해지는 것도 좋지만은 않았어요. 그럴 때마다 마리는 아이들과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생기는 걸 느끼곤 했어요.
--- p.19
아줌마는 요술 손이라도 가진 것처럼 옥상을 멋지게 바꾸었어요. 마리는 채소 싹보다 옥상 풍경이 더 궁금할 정도였어요. 탁자에 앉아서 숙제를 하거나 동화책을 읽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았어요. 삼겹살도 돗자리보다는 탁자에 앉아서 먹으면 더 맛있을 것 같았고요. 하지만 어림없는 일이겠지요.
--- pp.34~35
“어릴 때 키우기 힘들다고 나를 다른 집에 보냈던 거 잊었어?” 물을 주던 마리의 손이 멈칫했어요. 아줌마에게 그런 일이 있었다니요. 엄마가 마리를 키우기 힘들다고 다른 집에 보낸다면 얼마나 무섭고 슬플까요. “나, 그때 여섯 살이었어. 다시 돌아와서 겨우 적응하고 있는데 이번엔 친엄마한테 가라고 했잖아.” 아줌마의 엄마 아빠가 헤어져 살았나 봐요.
--- pp.41~42
마리는 아줌마가 준 막대를 고추 옆에 꽂고 끈으로 서로를 묶었어요. 이제 고추는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흔들리거나 쓰러지지 않을 거예요. 마리는 아기 고추가 된 듯 든든했어요. 문득 아줌마는 오이고추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추는 고추인데 안 매운맛 고추요.
--- pp.81~82
“영미 이모도 업어 주셨어요?” 마리가 반갑게 물었어요. “그래, 영미도 너처럼 산소 앞에서 울고 있었지. 삼십 년이 다 돼 가네. 휴, 언제 이렇게 세월이 흘렀는지…….” 할머니 목소리가 노을처럼 마리의 가슴을 물들였어요. 울고 있는 어린 영미와 팥쥐 할머니 등에 업힌 영미 모습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 pp.136~137
“십 년 아니라 삼십 년이 됐어도,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처럼 겉도는 기분이 들 때가 있어.” 할머니 말에 이번엔 이모의 표정이 멈칫했어요. 물에 떨어진 기름방울. 물과 기름은 섞이지 않잖아요. 할머니는 언제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요.
--- p.148
마리는 엉엉 울면서 말했어요. “뭐가 나를 위해서야? 내 마음도 있는데 왜 엄마 아빠 마음대로만 해? 큰 학교에 다녀도 나는 친구 없어. 현서 엄마가 생일 파티에 나는 데려오지 말라
고 했대. 애들은 내가 한국 사람 아니라고 싫어하고, 네팔 사람들은 나한테 한국 애 다 됐다고 뭐라고 하잖아. 나보고 어쩌라고. 그게 내 잘못이야? 자꾸 이사 다니는 거 정말 싫어. 오래오래 한집에서 살면서 친구도 사귀고 싶고, 친구들 부를 수 있게 내 방도 갖고 싶다고!”
--- pp.165~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