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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명의 시간을 담다

: 시간을 수집하는 사진가

리뷰 총점9.0 리뷰 21건 | 판매지수 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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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4월 01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513g | 145*200*30mm
ISBN13 9788970597324
ISBN10 8970597328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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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어른이 된 지금도 나는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서면 박제된 수많은 동물들이 전하는 소리 없는 속삭임이 들리는 듯하다. 방문객이 뜸한 자연사박물관에 들어설 때면 숨겨지고 감춰진 소리들이 내 가슴을 치고 있음을 느낀다. 유년시절 뙤약볕 아래에 앉아 나뭇가지 위에서 날갯짓하는 나비와 잠자리를 멀뚱히 바라보며 한나절을 보내곤 했던 것처럼, 나는 그곳에 가면 가만히 서서 박제된 곤충과 동물들의 조용한 숨소리를 들어 보려 노력한다. 박제가 되기까지의 그들의 기구한 삶과 아직도 어딘가에 떠돌아다니고 있을 그들의 혼이 나를 붙잡아, 박물관의 문을 닫을 때까지 나는 그들에게서 발길을 뗄 수가 없다.

‘굿바이 파라다이스’는 한때 생명을 품었던 것들이 낙원에 안녕을 고하면서 역설적으로 삶 너머의 진짜 낙원에 도달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작업한 것이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것들, 들리지 않는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는 것들 그리고 생명을 들고 나는 숨. 그런 찰나의 대상물을 촬영할 때 내가 느끼는 교감은 일정량의 에너지로 필름에 스며든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어떤 사진을 보고 감동을 느꼈다면, 안에 담긴 대상에서 비롯해 필름 속으로 숨어든 에너지가 인화지에 혹은 책에도 조금씩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 속의 존재들」중에서

인물사진이란 그 인물과 사진가의 교감이 일어나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므로 사진가의 성격이나 취향에 따라 인물을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읽고 싶어 하는가가 그 인물사진의 주된 특징이 될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의 얼굴에 끌리는 순간은 어떤 상처나 슬픔 같은 정서가 드러날 때, 즉 ‘사연이 있는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구한말 조선에 사진술이 처음 들어왔을 때 사진은 영혼을 빼앗는 것이라며 사람들이 두려움을 가졌던 것처럼, 내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어떤 모습이 유난히 눈이 띌 때마다 사진으로 누군가의 영혼을 훔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했다. 그것은 내가 억지로 유인해 낸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모양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 보니 그런 모습만 걸러지기 때문일 것이다.
---「목적이 있는 것과 없는 것」중에서

내가 연출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 해도 사진의 본질은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기에, 그 기본이 되는 것은 여전히 스냅이다. 우리는 흔히 카메라를 메고 다니다 사냥꾼처럼 포착하는 순간의 기록을 스냅사진이라 말한다. 스냅의 가장 큰 매력은 내가 의도한 상황이 아닌 외부의 상황에서 기인하는 짜릿한 순간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기치 못한 풍경이나 사건을 만났을 때 스냅의 맛은 더욱 살아난다.

그러나 스튜디오에서 백자를 찍는 정적인 작업에서도 ‘순간’은 다를 바 없이 중요하다. 사전에 준비한 정물을 촬영할 때 최적의 상황을 작가가 만들고 결정할 수 있다. 빛이나 배경 같은 요소를 원하는 대로 연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순간에 셔터를 눌러야 하는지 결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하얀 배경과 검은 배경, 자연광과 인공 조명, 탑 조명과 사이드 조명 등 수십 수백 가지의 선택 가운데 어떤 순간을 잡아낼 것인가, 이것은 근본적으로 순간에 대한 고민이며 모든 사진에 적용되는 것이다.

백자를 수없이 촬영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을 때가 있고, 어느 순간 그 백자가 내게 말을 건넬 때가 있다. 스튜디오에 꽃이 담긴 화병을 갖다 놨을 때에도 항상 촬영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다. 몇날 며칠 그냥 지나치다가 어느 날 해가 이만큼 기울었을 때,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졌을 때 내게 교감의 ‘순간’이 온다. 나는 그 ‘순간’을 기다린다.
---「도구와 방법」중에서

독일인들은 물건을 무척 아낀다. 친구 악셀의 집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의 부모님은 함부르크 외곽의 시골에 살았는데, 그 집 목욕탕에 걸려 있던 수건이 악셀이 어렸을 때 찍은 사진에도 똑같이 걸려 있었다. 그때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인지 나도 30년 전에 독일에서 쓰던 수건을 아직도 사용한다. 수명을 다한 수건은 걸레로 만들어 암실에서 쓰고 있다.

그만큼 물건을 철저히 아끼고 오랫동안 보존하는 독일인들답게 벼룩시장에 나오는 물건들은 누군가 오래도록 사용한 것들이다. 그런 낡은 것들을 다른 사람이 다시 컬렉션 하는 것이다. 그래서 멋진 물건들이 죽지 않고 오래 살아남는다. 나는 그곳에서 옛날 물건에 대한 유럽인들의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개성 출신인 우리 집도 유난히 아끼고 오래 쓰던 습성이 있었는데, 독일에 가서도 쓰임이 없어질 때까지는 버리지 않던 그들의 생활방식과 오래된 물건을 보는 심미안을 다시금 배웠던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지나가다 우연히 멋진 전시회 포스터를 발견하면 행사가 끝난 후 기어이 찾아가서 뜯어 오는 사람이 되었다. 이탈리아 여행 때 가져온 것들도 있다. 인도에서는 상인이 깔고 앉아 있던 방석이 멋있어서 빼앗다시피 사왔다. 내 집에는 88올림픽 퍼레이드가 끝나고 여의도 광장에 버려졌던 벽시계와 주인에게 사정하다시피 해서 얻어 온 가회동 복덕방의 간판이 아직 남아 있다.
---「사물에 귀 기울이다」중에서

생활 속에서 너무 익숙하여 무심히 지나쳐 버리는 것들로부터 문득 놀라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나에게는 비누가 그런 물건들 중의 하나이다. 비누는 자기 몸을 녹여 거품을 만들고 그것으로 우리의 때를 씻어 낸다. 그렇게 비누는 결코 멈추는 법 없이 끊임없이 소멸한다. 비누에게는 살아가는 행위가 곧 죽어가는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가 비누의 마지막 순간을 목격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다 써서 닳아지거나, 실수로 하수구에 빠뜨리거나, 또는 새 비누와 합쳐져서 그냥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연장을 사용하여 개성 있는 모습으로 연마할 수 있는 돌멩이를 은자(隱者)라 한다면, 거품을 내며 조용히 사라져 가는 비누는 얼굴 없는 노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심코 흘려버리기 쉬운 사라짐의 순간에 나의 카메라가 포착한 비누는 보석같이 영롱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었다.

이런 존재가 우리 주변 곳곳에 숨어 있다. 내가 찍으려는 사진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물이나 현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포함하여 이렇게 끊임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주변의 것들이다. 렌즈에 담기는 모습들이 그 각각의 사라짐의 순간이라는 점에서 사진가의 작업과 비누는 공통점을 갖는다.
---「일상의 보석」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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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사진작가 구본창의 에세이다. ‘시간을 수집하는 사진가’가 작가를 가리킨다면, ‘공명의 시간을 담는’ 행위는 그의 작업을 뜻한다. 사진 에세이는 통상 사진의 의미에 대한 해독과 작업 과정에 대한 소개 등으로 이루어지지만, 구본창이 주로 기록한 것은 자신의 이력이다. 곧 사진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성찰을 담았으니 ‘구본창이 모든 것’이라고 불러도 되겠다. 그에게 사진이란 무엇인가. 구본창은 사진가의 작업을 “사라져 가는 일상의 순간순간을 잡아내어 기록하며 그 매순간의 공명을 담아내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가 기록한 시간은 처음 사진에 발을 들여놓은 독일 유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물’과 함께 ‘셀프 포트레이트’(자화상)를 과제로 수행하면서 구본창은 자기 자신을 작업이 소재이자 주제로 삼게 된다.

1980년대에 귀국하여 찍은 ‘열두 번의 한숨’ 같은 연작은 그의 주제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신을 피사체로 찍은 열두 장의 폴라로이드 사진은 일상의 많은 규율과 제약 속에서 질식할 것 같았다는 작가의 고통을 잘 표현하고 있다. 90년대에 발표한 ‘태초에’ 연작 역시 신체와 몸짓을 통해 “우리가 삶에서 겪는 욕구와 좌절의 경험들”을 보여주고자 했다. 구본창의 작품세계는 이러한 신체 이미지에 한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확장돼 왔다. 특히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탈’과 ‘도자기’ 시리즈로 이어지기도 했다. 한 예술가의 내밀한 자기 성찰로도 읽히는 이 에세이는 “창작자에게 고독이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자 함께 가야 할 동반자”라는 깨달음으로 마무리된다. 사물의 영혼에 다가가려고 한 ‘창조적 고독’의 여정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
- 이현우 (서평가, 『로쟈의 인문학 서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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