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러를 켜고 세수를 하고 자리를 폈다. 아빠가 전기장판의 코드를 꽂으면서 무심히 물어 왔다.
“엄마랑 형은? 잘 있어?”
아빠는 괜스레 들고 있던 수건으로 전기장판에 묻은 먼지를 툭툭 떨어냈다. 오늘 나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합죽하게 다문 입도, 웃음기 없는 눈매도 그대로인, 세상 무뚝뚝한 나의 아빠.
“뭐, 잘 있죠. 근데 정희 아줌마 주근깨는 볼 때마다 더 느는 것 같아.”
나는 심통이 나서 괜히 트집을 잡았다.
“그래? 정희한테 주근깨가 있었나?”
심각하다. 모든 종파의 수장들을 한곳에 불러 모아 긴급회의를 열어야 할 판이다. 타지에서 고생하는 엄마를 두고 하필 정희 아줌마라니. 굉장히, 상당히, 몹시 불쾌했다. 불끈 차오른 분노로 머리가 쭈뼛 섰다.
아무 생각이 없는 아빠는 내가 가져온 마트 가방을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목을 빼고 아빠가 사라진 쪽을 살피다 하마터면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가슴이 다시금 벌렁거렸다. 엄마가 보낸 ‘그것’을 지금쯤은 보았을까.
--- pp.33-34 「나쁜 사랑」 중에서
재래시장은 더위 때문인지 인적이 드물었다. 이글이글 끓고 있는 태양 아래 혼자 걷고 있자니 마치 고등어가 된 것 같았다. 벌건 맥반석 화로 위에서 자글자글 타들어 가는 나와 내 아기. (중략)
만약에, 진짜 만약에 아기를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바보 같지만 상상은 자유니까. 그럼 나는 돈도, 능력도, 미래도 없이 비참해질까. 더워 죽겠는데 해를 피해 숨을 곳이 없다. 피와 수분을 빨려 머리가 어지럽다. 한 번에 하나씩 생각을 정리해 보자. 방학이 지나면 나온 배를 숨길 수 없을 거야. 집을 나가야 하겠지. 그러자면 가방도 필요해.
나는 자그마한 가방 가게로 발길을 옮겼다. 가방 가게 주인아줌마가 몇 개월이냐고 물었다. 자, 물부터 마시고 여기 좀 앉아서 천천히 골라요. 워메? 아니, 왜 울어, 아기 엄마. 왜 울어요, 아기 엄마.
주인아줌마는 가방 값을 오천 원 깎아 주었다.
--- pp.79-80 「코르셋」 중에서
“알지? 나는 안 한 거다.”
나는 영수를 괴롭히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어디에도 학교 폭력은 없었다고.
최종적으로 내 진술이 기호를 도왔고, 기호는 도망치듯 전학을 갔다. 아빠는 일을 계속할 수 있었지만 모두가 쑥덕거렸다. 주로 가해 의심 학생인 나 서인우와 피해 의심 학생인 오영수에 대해서.
부모님도 나를 욕했다. 택시 회사고 지랄이고 나더러 다 변명이라고 했다. 진실을 이야기해야 해. 책임을 져야 해. 우리가 자식을 잘못 키웠어. 우리도 책임이 있어.
“서인우, 저 자식이 제일 나쁘네. 자긴 괴롭힌 적 없다고 딱 잡아뗐다며?”
수천수만 개의 비난이 나에게 쏟아졌다. 나는 점점 작아져 갔다. 영수 부모님이 찾아와 어금니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네 거짓말, 다 알아. 왜 그랬어? 영수 친구였잖니.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기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외출하는 나를 붙잡고 물었다. 오영수 학생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지금 어떤 심정입니까? 기분이 어때요?
그렇게 안타까우면 왜 아무도 영수를 돕지 않았지? 이제 와서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건데? 화가 불쑥 치밀었다.
--- pp.105-106 「선 위의 아이들」 중에서
“어서 오이소! 뭐, 찾는 거 있습니꺼?”
이제는 뒤로 내뺄 수도 없었다. 그때 민지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어, 하며 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굳어 버린 나를 자세히 쳐다보았다. 갈변한 화상 흉터가 미세하게 떨리더니 곧 나를 알아보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찡그린 표정으로 민지 앞에 멀뚱히 서 있었다.
“어? 니, 상희 아이가? 서상희!”
“어, 그래……. 안녕……?”
“엄마야, 이기 얼마만이고! 니, 하나도 안 변했데이. 완전 반갑다!”
민지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불현듯 눈이 부셨다. 최근 몇 년 동안 이토록 빛나는 미소를 나는 접한 적이 있었던가. 예상과는 달리 민지는 여전히 빛, 천사, 벚꽃이었다.
하지만 아닌데, 이럴 리가 없는데. 혹 내가 갖지 못한 무언가를 민지가 비밀스럽게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들자 가뜩이나 소박했던 나의 의욕이 모두 소진되어 버렸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때 민지가 앞치마에 비린내 나는 두 손을 쓱 한번 닦고는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손을 비틀어 뿌리쳤다. 어정쩡한 타이밍, 어정쩡한 분위기. 내가 민지를 찾아온 것도, 손을 뿌리친 것도, 모든 게 어정쩡했다.
--- pp.159-160 「지하철 1호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