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대화법(논쟁 대화술)’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싸움에서 이기는 기술이다.?누구든 어떤 문제에서 객관적으로 옳을 수도 있지만 옳지 않을 수도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이 보기에도 틀린 얘기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논쟁 상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신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의 반론은 당신에게 ‘양날을 가진 칼’로 작용할 것이다. 즉 이는 당신에게 상대의 주장을 논박할 근거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상대가 자기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로 역이용할 가능성도 동시에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원리는 당신의 논쟁 상대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 역시 객관적으로 틀린 자기주장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쓸 테니 말이다. 어떤 주장의 객관적인 진실 여부와 논쟁하는 사람들, 논쟁을 듣는 사람들이 모두 인정함으로써 생긴 진술의 효력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주장이 ‘진리의 편에 서 있는가’와 그 주장이 ‘논쟁 상대 · 논쟁을 듣는 청중 모두의 동의를 얻어 진리의 편에 선 것처럼 보이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얘기다. 이 책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후자의 논쟁 대화법이다.
---「‘양날을 가진 칼’을 다루는 위험하고도 섬세한 기술, 논쟁 대화법」중에서
논쟁 대화법은 어디서, 어떻게 생겨났을까? 흥미롭게도, 인간이라는 생물 종이 가진 태생적 ‘악의’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는 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악의가 없었다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정직했을 것이기에 무자비한 공격과 속임수가 난무하는 논쟁 상황 자체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또 만일 그랬다면 사람들은 무슨 토론을 하든 애초에 자신이 내세운 의견이 맞는지, 상대가 내세운 의견이 맞는지 여부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고 오로지 진실을 밝히는 일에만 모든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또 만일 그랬다면 자기 의견이 맞는지는 상관없거나 부차적인 요소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는 정반대다. 인간은 지성과 관계된 일이라면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묘한 감정과 허영심 탓에 자기주장이수 있고 상대 주장이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주장을 말하기 전에 깊이 잘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 문제는 이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대다수 사람이 허영심에 더해 떠벌리고 꾸며서 말하는 태도를 함께 타고나기 때문이다. 그 탓에 생각 없이 말해 버리고 나중에야 자기주장이 틀렸다는 걸 깨닫는다. 이럴 때 사람들은 속마음을 숨긴 채 겉으로는 그 반대인 것처럼 보이려고 애쓴다. 참된 명제를 증명하고자 하는 유일한 동기였던 진리를 향한 관심을 마음속에서 몰아내고 허영심을 채우려는 욕심에 그 자리를 내주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참은 거짓이라는 오명을 쓰고 거짓이 진실로 둔갑한다.
---「인간이 가진 태생적 ‘악의’에서 논쟁 대화법이 탄생했다?」중에서
대화술에서는 객관적 진실을 논외로 하거나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당신은 오로지 당신의 자기주장과 논리를 견지하고 상대의 논리와 주장을 꺾는 일에만 집중해야 한다. 논쟁 상황에서는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객관적 진리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논쟁이 벌어지면 때로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냥 그렇다고 믿지만 착각일 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신과 논쟁 상대 모두 그렇게 믿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말대로 “진리는 심연 속에 있기(veritas est in puteo)” 때문이다.
대다수 사람은 논쟁이 시작될 때 ‘진실이 자기 편’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논쟁이 진행되면서 논쟁 상대 양측 모두 확신을 잃고 회의에 빠진다. 결국 진실을 확정하는 것은 논쟁의 결과뿐이다. 이렇듯 대화술은 진리나 진실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생각해 보자. 죽고 사는 결투에 나선 검투사가 자기가 옳은지 그른지 신경 쓸 여유가 있는가? 한마디로 대화술은 ‘머리로 하는 검술’이다. 찌르기와 막기, 이 두 가지에만 매진하면 된다. 이렇게 단순한 관점으로 보아야만 대화술이 효과적인 특유의 기술로 정립된다. 만일 당신이 객관적 진실만을 목적으로 둔다면 당신은 다시금 ‘단순한 논리학(Logik)’에 머물고 말 것이다. 반대로 만일 당신이 그릇된 주장(문장)을 정당화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면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처럼 궤변(Sophistik)에 갇히게 될 것이다.
---「논쟁 대화술은 ‘머리로 하는 검술’이다」 중에서
당신이 결론을 내리기 전까지 논쟁 상대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라. 그러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상대가 눈치채지 못하게 당신이 추론하는 데 필요한 전제를 하나씩 흘려 놓고 교묘히 언급해 두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상대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당신의 계획에 딴지를 놓거나 방해하려 할 것이다.
논쟁 중에 상대가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전제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으로 짐작되면 전제의 전제를 깔아 두거나 예비 추론을 조금씩 해 두는 것도 좋다. 순서와 관계없이 예비 추론에 필요한 몇 개의 전제를 띄엄띄엄 던져 상대가 무의식중에 수긍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게임의 법칙을 교묘히 은폐하다가 효과적인 필요한 재료가 완벽히 갖춰졌을 때 갑자기 결론을 내리는 대화술이다.
토끼와 사슴 등 야생동물을 사냥하듯 바깥에서 안으로 주제를 좁혀 가라. 이 전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토피카』 제8권 제1장에도 소개되어 있다. 이와 관련한 예시는 필요 없다.
---「논쟁 대화술 4_ 당신의 전략을 감춰라」 중에서
당신이 원하는 결론을 끌어내는 데 필요한 질문을 굳이 순서에 맞게 던질 필요는 없다. 뒤죽박죽 순서를 바꿔 질문하라. 그렇게 하면 논쟁 상대는 어디서 어떻게 논박을 시작해야 할지 몰라 당황할 것이며, 어떤 논리를 펴야 할지 감을 잃고 헤맬 것이다. 반면에 당신은 상대의 답변을 역이용해 다양한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고, 그걸 뒤집어 반대되는 결론을 끌어낼 수도 있다. 당신이 어떤 전략을 펼칠지 은폐한다는 점에서 논쟁 대화술 4와 비슷하다.
---「논쟁 대화술 9_ 순서를 뒤죽박죽 바꿔 질문하라」 중에서
상대에게 어떤 명제를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과 상반되는 문장을 큰 목소리와 강한 어조로 제시하고, 그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상대는 모순에 빠지는 일을 피하고자 자신이 보기에는 반대라고 생각하면서 당신의 전략에 속아 넘어갈 것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주장에 상대가 동의하게끔 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사람은 모름지기 아버지의 말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
이럴 때는 다음의 질문이 효과적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서 부모에게 복종해야 할까요, 아니면 복종하지 말아야 할까요?”
상대가 만일 ‘종종’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말하면 그 ‘종종’이 적다는 뜻인지 많다는 뜻인지 따져 물어라. 그러면 아마도 그는 ‘많다’는 의미라고 대답할 것이다. 검은색 옆에 회색을 놓으면 회색을 ‘희다’고 표현하지만 흰색 옆에 회색을 놓으면 ‘검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반대 명제를 피하다가 동의하게 만들어라」중에서
당신이 상대와 반박하고 재반박하며 티격태격 말다툼하다 보면 자칫 논쟁이 과열될 위험이 있다. 이때 어느 모로 보든 상대의 주장이 참이어서 반론할 여지가 없다면 오히려 이런 경향성과 분위기를 자극하고 부추겨라. 그렇게 일부러 상대를 자극하여 선을 넘게 하고 과장된 주장을 되풀이하게 만들어라. 운 좋게도, 당신의 전략이 먹혀들어 성공을 거두었다면 논쟁 상대의 선 넘은 주장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그가 처음에 펼친 논리도 타당하지 않은 것으로 몰아세울 수 있다.
반면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상대의 주장을 논박하느라 자칫 선을 넘거나 논리의 범위를 확장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럴 땐 상대도 당신의 주장을 즉각 확대해석하려 시도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단호한 태도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면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무엇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는 말로 당신의 주장에 명확히 선을 그어야 한다.
---「상대를 자극하여 선을 넘게 하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