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학교 기숙사가 좋았다. 깨끗하고 넓고 편리하니까. 반면 아빠 집은 좁고 오래됐다. 원시적이고 첨단 기술이라고는 전혀 볼 수 없었다. 전등 스위치도 에어컨도 보안 시스템도 내 손으로 직접 작동해야 했다. 게다가 요리 못하는 아빠랑 살게 되면 지금보다 건강이 나빠질 게 뻔했다.
사실 중학교에 가서도 계속 기숙사에서 살고 싶다고 어제 아빠한테 말할 참이었다. 그런데 차마 이야기하지 못했다. 아빠 얼굴이 너무 어두워 보였기 때문이다.
아빠가 거실에서 술을 마시면서 물었다.
“희민아, 너도 로봇이 좋아? 걔들은 선생이 아니야. 그냥 로봇이지, 기계라고. 그저 프로그램대로 너희를 돌보는 거야. 너희 미래를 걱정하는 건 사람만 할 수 있는 일이야.”
--- p.11
이름하여 ‘에브리데이 양육 프로젝트’. 자녀를 낳지 않으려는 국민을 위해 나라에서 365일 24시간 아이들을 대신 돌봐 주는 제도다.
우선 아기가 태어나면 AI 보모 로봇이 24시간 돌보는 양육 센터로 보내졌다. 초등학생이 될 때까지 AI 보모가 기숙사에서 아이를 키웠다. 수업도 하고, 상담도 하고, 훈육도 하고, 같이 놀아 주기도 했다.
부모는 실시간 영상을 통해 자녀가 어떻게 생활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주말 혹은 자신들이 원하는 시간에 자녀와 시간을 보냈다. 덕분에 인생을 즐기면서 아이를 키우게 되었고, 사람들은 다시 자녀를 낳기 시작했다고 한다. 물론 우리 아빠처럼 이 프로젝트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 pp.12~13
그날 이후 나는 위치 확인 요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건 내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 궁금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위치 공유를 요청한다는 건 내가 있는 곳에 갑자기 나타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뒤이어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거고.
--- p.15
“선도 초등학교 AI 상담 로봇이 이희민 학생의 데이터를 분석하던 중 위험 요소를 포착하여 신고하였습니다. 아동 학대 예방 차원에서 저희는 학생의 주거 환경을 확인하고 보호자와 학생을 따로 면담할 예정입니다. 본 방문은 아동 보호법에 의해 보호자의 동의 없이 수색 및 면담이 가능함을 알려 드립니다.”
‘아동 학대? 아동 보호법? 이게 무슨 일이지? 사이버캅은 뉴스에서나 보던 나쁜 사람들을 잡아가는 로봇인데…….’
아빠도 충격 받은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거렸다.
“AI 상담 로봇이 나를 신고했다는 거야? 로봇이?”
--- p.18
그 무렵 나는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게 세상에서 가장 싫다고, 작아진 집도 차도 싫다고 상담 로봇에게 말했었다. 엄마, 아빠가 이혼이라도 할까 봐 무섭다고도 말했다.
두 사람이 이혼한 걸 알게 된 날, 나는 상담 로봇에게 달려가 우리 엄마, 아빠가 다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더 이상 엄마가 나를 보러 오지 않을 때도, 아빠가 오래되고 누런 와이셔츠를 입고 나를 데리러 왔을 때도 나는 상담 로봇한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엄마가 밉다고, 아빠가 예전처럼 멋있는 모습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 p.35
‘아빠에게 불리한 내용은 모두 사라지고, 내가 아빠에게 유리한 답변을 한다면 모든 게 해결되지 않을까? 그래도 왠지 해킹은 하고 싶지 않은데……. 정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
--- p.44
지안이가 가족의 행복을 건다고 말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안이만큼 가족과 잘 지내는 아이는 없으니까. 지안이는 우리 반에, 아니 전교에 얼마 되지 않는 특별한 아이였다. 기숙사에 살지 않고 집에서 학교 다니는 아이. 지안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엄마, 아빠 품에서 자란 아이였다.
--- p.47
“나는 우리 엄마, 아빠가 제발 나 좀 내버려두면 좋겠어. 그래서 중학교는 무조건 프로그래밍 영재학교에 갈거야. 거기 정도는 가야 부모님이 기숙사 있는 학교에 보내 줄 것 같거든. 나도 다른 애들처럼 기숙사에서 살아 보고 싶다, 진짜.”
--- p.55
“우리 부모님 때문에 그래. 그렇게 귀찮아할 거면 나를 왜 낳았나 몰라. 방학 때도 바쁘다고 캠프에 보내 버리고. 다른 애들은 다 집에 가는데.”
수호의 고백에 나는 무슨 말을 할까 고민하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 p.101
진짜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넓은 집에, 좋은 차를 타고 오는 부모님, 게다가 넉넉한 용돈까지. 부족한 게없는 수호는 말해도 모를 게 분명했다. 고민이라야 부모님이 자기를 귀찮아한다는 게 다였다. 내게는 좁은 집에, 허름한 차를 타고 오는 아빠가 있었다. 엄마와는 연락도 잘되지 않는 이혼 가정의 아이인 내 마음을 수호가 이해할 리 없었다.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없는 척, 뭐든 괜찮은 척 해야만 했다. 나처럼 초라한 아이는 나쁜 일을 해서는 더욱 안 된다. 이런 걸 수호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 p.104
‘왜 저렇게 풀이 죽은 거야.’
아빠는 비를 홀딱 맞은 병아리처럼 서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늘 씩씩한 척하던 아빠가 아들이 해킹을 시도해서 학교로 불려 왔으니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거다. 게다가 아동 학대로 신고까지 당했으니…….
‘사라지고 싶다, 진짜.’
기숙사 복도 벽 속으로 스르륵 스며들어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내가 문제인가?’
--- p.108
초등학교 저학년 때 사진을 지나니 유치원 시절 사진첩이 나왔다. 내가 유치원에서 노는 모습과 수업 시간에 그렸던 그림들이 보였다. 노래 부르고 밥을 먹는 영상도 있었다. 영상에 나오지는 않지만, 엄마 목소리도살짝 들렸다. 아기 때 사진 중에는 나를 안고 있는 엄마손이 보이기도 했다. 그때는 함께한다는 게 얼마나 특별한 일인지 몰랐다.
‘그래, 우리 가족도 함께였던 적이 있지.’
--- p.130
‘이런 거 필요 없는데. 그냥 예전처럼 하면 되는데 왜 아빠는 모르는 걸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기적이 아닐까?’
내 몸이 투명해지거나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거나 갑자기 모든 수학 문제를 풀 수 있게 되는 것보다도, 아빠가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지금 모습이 아빠의 최선일지도 몰랐다.
--- p.133
“맞아. 그냥 답답해서 불평 좀 해 본 거였다니까. 왜 좋은 집에서 살지 못할까, 왜 우리 부모님은 이혼한 걸까. 뭐, 그런 불만 말이야. 힘들 때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잖아. AI 상담 로봇은 내 부정적인 감정만 분석해서 아빠를 신고한 거야. 내 속마음도 모르고. 내가 아빠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 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