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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투루 읽지 않으려고

전승민 | 핀드 | 2024년 05월 3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10.0 리뷰 2건 | 판매지수 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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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5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240쪽 | 294g | 120*188*20mm
ISBN13 9791198172136
ISBN10 119817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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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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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 광안리 바다에 발을 담그고 서 있던 뙤약볕 아래의 시간은 그래서 ‘지금’ 내 모습으로 살게 된 시작점처럼 생각된다. 그날의 바다에서 이글거리는 햇볕을 온몸에 담으며 이제는 여태의 시간을 모두 뒤로할 때라고, 드디어 나의 ‘처음’을 선언해야 할 때라고 작심했다.
--- p.17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두려운 게 없다. 그런 마음으로 나는 새출발을 했던 것 같다. 어떤 가치를 획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커리어를 쌓고 그것을 잃을까 노심초사하던 시간 없이 오로지 내 두 발로 땅 위에 서는 것만을 삶의 최대 목표로 삼고 거의 삼십 대까지 와버렸다. 덕분에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생물학적인 나이나 사회문화적 지위 같은 것들이 별로 중요하게 와닿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무엇을 욕망하는 사람인지, 그것을 위해 어떤 선택과 노력을 해왔는지를 보여주는 그 사람만이 통과해온 시간과 과정이다.
--- p.22

말할 수 없거나 들을 수 없음, 언어를 매개하지 않은 존재들 사이의 이해는 머리나 마음만이 아닌 온몸을 적시게 되는 물질적인 과정으로서 발생한다. 그리고 그건 언어를 매개해서만 도달하는 이해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아주 느린 시간을 경유해서 서서히 물들어가는 서로의 실감은 매일 닥쳐오는 예측 불허의 감동 속에서 조금씩 더 확실해진다.
--- p.46

글에 마지막 마침표를 찍고 손에서 놓아 보내는 것에는 모종의 숭고함이 깃들어 있다. 세상의 모든 글이 그렇다. 심지어 스스로가 최선을 다하지 못했음을 아는 글인 경우라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지가 나의 최선임을 시인하기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그 지점에서는, 그 마지막 마침표 앞에서는 누구도 거짓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읽는 모든 글 앞에서 내가 가진 최선의 정직함으로 임한다. 허투루 읽지 않으려고 애쓴다.
--- p.69

살아가는 행위 자체가 비평이라고 느낄 때가 많다. 상대방의 목소리를 듣고 그 안에 담긴 것과 그가 부러 담지 않은 것을 가려내어 이해하는 일, 그것이 나의 세계와 어떻게 공명하는지 찾는 일. 어떤 존재와 깊이 밀착하여 그의 시간을 함께 살아내는 일은 기도와도 같다.
--- p.85

미안하다는 말은 분명 함부로 남발할 말이 아니지만 그 한마디를 하지 않았을 때 발생하는 부작용은 생각보다 훨씬 크다. 진심이나 진정성이라는 말과 더불어 아무리 자신의 입장과 마음을 설명한다 해도 “그러니 내가 미안해”라는 말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그 모든 ‘진심’은 그저 거대한 자기합리화와 배출의 시간에 불과하고 말 것이다. 미안하다는 말은 패자의 언어가 아니라 용기 있는 자의 말이다.
--- p.100

나는 내가 작아지는 게 좋다. 편안하고 보잘것없고 사소해지는 평범함에서 오는 너른 시야가 좋다. 우리는 아주 작고 사소한 존재들이면서 바로 그런 방식으로 강해진다. ‘나’라는 자아가 얼마나 작은지 깨달으면서 비로소 ‘너’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다.
--- p.105

나는 내가 문학 속에서 흩어지고 모이고, 다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것을 바라보고 싶다. 물론, 문학은 내 삶을 전에 없이 꼬이게 했다. 새로운 고통의 종류를 알려주었고, 단순하던 것들을 어려운 역설 속으로 몰아넣으며 평화롭던 땅을 복잡한 미로로 만들었다. 이러한 위태로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극한의 자유다. 헤맬 수 있는 자유, 오늘과 내일은 어제와 다를 수밖에 없다는 필연적인 변동의 가능성은 나를 숨 쉬게 하는 궁극의 불안이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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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험난한 불신과 혐오의 사회에서, 이토록 터무니없이 따스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그저 아무 의심 없이 덜컥 믿어버려도 될 것 같다. 단지 그녀의 다채로운 취향이 궁금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이 모든 텍스트-시, 소설, 사람, 사건, 사회까지 아우르는 ‘세계’라는 거대한 텍스트-를 읽어내는 섬세하면서도 열정적인 시선,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따스한 시선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전승민 평론가의 글을 읽으며 나는 단지 좋은 책 한 권을 읽은 느낌을 넘어 누군가와 밤새도록 술잔을 기울이며 강렬하게 교감을 한 듯한 기분 좋은 친밀감의 덫에 걸려버렸다.
- 정여울 (에세이스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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