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안의 이방인 A Stranger Within the Family
기본적 정의
가족 안의 이방인은 마치 한마음 한뜻인 것처럼 가정된 가족정체성 내부의 차이와 균열을 포착하기 위한 은유적 부호이다. 이는 사랑, 친밀함과 같은 가족의 이상이 가족 안팎의 경계를 눈에 띄지 않게 은폐할 수 있음을 비판적으로 상기시킨다.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 1941~ )에 따르면 “이방인은 우리들의 정체성의 감춰진 측면이고, 우리들의 머묾을 없애는 공간이며, 화합과 공감 근저에 놓여 있는 시간이다.” 때때로 내 자신조차 오래 머물던 곳에서 낯선 이방인이 된 듯 소외될 때가 있다. 한 사람의 정체성도 일생동안 계속되는 타자화를 통해 불연속적 변화를 겪는데, 하물며 가족이라는 집단은 수많은 차이와 이질성의 교차 속에서 끊임없이 교섭되고 타협되는 중층적 시간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족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가족정상성 규범에 동화되지 않는 타자성을 민감하게 대하는 감수성을 필요로 한다.
개념의 기원과 발전
가족 안의 이방인이라는 은유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먼저 집단에서 이방인의 문제가 철학적으로 어떻게 논의됐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집단에서 이방인의 문제는 아주 오래된 철학적 테마이다. 대표적으로 플라톤의 많은 대화편은 이방인(xenos)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신성모독으로 기소당한 소크라테스는 법에 관한 한 자신은 이방인이라고 선언한다. 자신을 이방인으로 대해달라고 변론한 이유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이방인에 대한 환대가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통 철학에서 이방인의 문제는 민족과 국가의 경계에서 체제 유지와 포섭 및 동화를 둘러싼 중요한 정치적 · 윤리적 테마가 되었다.
그러다가 이방인의 문제를 사회학적 테마로 처음 정식화한 것은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미학자인 짐멜(Georg Simmel, 1858~1918)이다. 그는 이방인을 어떤 고정된 지점에서 분리되어 있다는 공간적 의미를 넘어, 인간들의 상호작용에서 나타나는 가까움과 멂의 독특한 조합이라는 사회학적 의미로 파악하였다. 짐멜에 따르면 이방인은 어떤 집단 내부에 있으면서도 그 내부에 있지 않은 특성을 끌어들이는 자이다. 다시 말해 이방인은 집단에 속하지 못한 채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우면서도 멀리 있는 중간자적 성격을 지닌 자이다. 한편으로 이방인은 집단 안에 소속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주변인과 적대자로서의 낯섦을 갖는다.
짐멜은 이 낯섦이 집단에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긍정적인 관계, 다시 말하자면 특수한 상호작용의 형식”을 낳는다고 본다. 이방인은 집단 안에서 가까운 인간관계에 접촉하면서도, 친족 관계나 지역적?직업적 상태의 그 어떠한 개별적 요소들에 의해서도 고정되지 않기 때문에 ‘객관성’이라는 특별한 태도를 보인다. 이 태도는 단순히 거리를 두는 중립적인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가까움과 멂, 그리고 무관심과 적극적인 관여를 독특한 방식으로 조합하는 자유로운 태도를 뜻한다. 이방인은 가족이나 당파의 이해관계에 매이지 않고 공평무사하게 활동할 수 있으며, 질적으로 새로운 관계성을 창조하고 다채로운 상호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이방인은 집단에 대해 냉철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집단 내부의 문제점을 통찰하거나 집단 구성원들조차 모르는 비밀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짐멜은 이방인도 집단의 유기적 구성원이며, 집단의 통일적 삶을 가능케 하는 특별한 조건이라고 말한다.
철학자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에 따르면 이방인은 본래부터 이방인일 수 없다. 이방인(etranger/stranger)이 이방인이 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상황, 자신이 무지에 빠져버리는 낯선(etrange/strange) 상황에 놓일 때이다. 이 무지 때문에, 그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자신이 처해있는 낯선 상황을 알기 위해,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기 위해 질문한다. 그는 또한 질문을 받는다.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위해 왔는지, 무엇을 찾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 받는다. 그러므로 그는 질문과 연관된 존재, 질문을 통해서만 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데리다는 이런 질문의 상황을 이방인에 대한 본질적인 규정으로 보고, 이방인을 ‘질문하는 존재’로 규정한다. 이방인의 질문은 내부의 고유한 질서를 흔들고 동일성을 의문시한다는 점에서 해체의 힘을 갖는다.
페미니즘 사상가 크리스테바는 정신분석학적 접근을 통해 이방인이 고국을 떠남으로써 형성되는 범주가 아니라, 인간 정체성의 한 부분이며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범주라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남/여, 성인/아이, 장애/비장애, 결혼/비혼, 토착민/이방인 등의 이분법적 도식으로 명확히 구별되지 않는 문턱과 경계에 서 있다. 즉 이방인의 특성은 우리 모두가 자기 안에서 발견할 수 있고 정체성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하는 속성인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자기 안에서 이방인의 비밀은 무의식적 차원으로 숨겨져 있고, 이를 탐색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과제라고 본다. 그녀는 우리들 자신 속의 이방인에 대해 존경을 표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 각자의 고유한 심연과 낯섦을 발견할 기회를 주고, 이방인에 대한 폭력이 아닌 이방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고민할 수 있는 구성적 사유로 초대해주기 때문이다.
짐멜, 데리다, 크리스테바의 논의에서 이방인은 단절과 소외의 상징이 아니라, 단일한 집단정체성 내부의 비동일성을 사유하는 일종의 비판적 부호처럼 사용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를 우리는 가족 안의 이방인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많은 집단 가운데 가족은 유독 세상에서 가장 친밀하고 가까운 집단으로 표상된다. 반면 이방인은 내가 속한 집단 외부의 사람, 즉 ‘우리’라는 공동체에 속할 수 없는 외부인이라는 의미에서 가족과는 동떨어진 존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인류 역사에서 실제 가족의 구성을 들여다보면 가족과 비가족의 경계선을 확실하게 가르기 힘든 경우가 많다.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 1927~1998)에 따르면 가족은 다른 여타의 사회적 집단들과 달리 전인격적인 소통을 특징으로 한다. 즉 가족은 한 사람의 인격과 관련된 모든 것이 소통되리라는 기대심리가 작동하는 장소라는 것이다. 보통의 사회생활에서 우리는 인격 전체를 나누는 게 아니라, 능력, 직급, 성과, 역할, 외모, 이해타산 등에 따라서 상대방과 부분적인 관계만을 맺는다. 하지만 가족은 나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식생활, 의식상태, 애정, 돌봄, 사회화, 교육, 여가, 가치관, 정치적 입장 등)을 들을 권리가 있고 말하고 답해야 할 의무도 있다고 여겨진다. 이런 권리와 의무가 기대만큼 충족되지 않을 때 가족에 대한 오해와 불통, 갈등과 폭력이 싹트게 된다. 내 인격을 전부 가족에 짐 지우고 오로지 가족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 할 때, 가족기능의 과부하로 우리는 매우 위험한 소통에 노출될 수 있으며, 급기야 가족해체에 이를 수 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