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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

조희룡과 골목길 친구들

: 조선 후기 천재 여항인들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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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04월 18일
쪽수, 무게, 크기 296쪽 | 514g | 148*210*20mm
ISBN13 9788928402274
ISBN10 892840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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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설흔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공부하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고전의 매력에 빠져 정신없이 독서를 하다가 그것을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뒤로 고전 속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을 쓰는 데 몰두하고 있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유독 ‘나’와 ‘너’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 깊은 공명을 일으키며 고전의 공간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책의 이면』 『퇴계에게 공부법을 배우다』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공저) 『소년, 아란타로 가다』 『살아 있는 귀신』 『내 아버지 김홍도』 등을 지었으며, 『멋지기 때문에 놀러왔지』로 2010년 제1회 창비청소년도서상 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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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참하고 쓸쓸한 최북 식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 최북의 모습을 그린 시 하나가 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시를 소리 내어 읊었다.

최북은 서울에서 그림을 파는 화가
살림살이는 벽만 덩그렇게 선 초가가 전부라네.
문 닫고 자리에 앉아 온종일 산수를 그리는데
유리 안경을 끼고 나무 필통 하나만을 가졌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을 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먹는다.
추운 날 찾아온 손님을 낡은 담요 위에 앉히니
문 앞 작은 다리엔 눈이 세 치나 쌓였다.

벗은 한숨 대신 낄낄 웃더니 그가 쓴 마지막 문장을 소리 높여 읽으며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최북의 풍모는 매섭고도 매섭다. 왕공 귀족의 노리갯감이 되지 않으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스스로를 이처럼 괴롭히기까지 한단 말인가?’ 나는 이 문장의 의미를 잘 모르겠네. 이 문장의 진의는 과연 무엇인가? 전적으로 칠칠이의 편을 드는 것인가, 아니면 칠칠이의 행동이 조금은 지나쳤다고 하는 것인가? 둘 중 과연 무엇이 자네 진의인가?”
---「내 눈이 나를 저버리는구나」 중에서

‘두렵겠지만 어느 순간 잘못 두는 때가 반드시 찾아온다. 젊은 너도 그 점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김한흥이 김종귀의 말에 숨어 있는 그 의도를 알아차렸을까? 김한흥이 대꾸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후대의 사람인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날의 대국 이후 김한흥은 달라졌다. 상대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패기 넘치게 바둑돌을 놓아 가던 모습이 사라졌다. 혼자 중얼거리던 버릇도, 얼굴을 찡그리던 버릇도 사라졌다. 김한흥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상대가 시간을 오래 끌어도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상대가 무르자고 해도 기꺼이 받아 주었다. 내기 없이 그냥 바둑만 두자는 사람이 있어도 응해 주었으며, 주위에서 훈수를 두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불쾌해 하지 않았다. 김한흥이 ‘바둑판 위의 군자’란 말을 듣게 된 연유이다. 다시 말하지만 김한흥이 김종귀의 숨은 의도를 알아차렸으리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김한흥의 이후 모습에서 김종귀의 영향을 분명히 보았다. 김종귀의 영향?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
---「잘못 두었을 때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중에서

“이야기책 읽어 주는 노인은 동대문 밖에 살았다네. 언문으로 쓴 숙향전, 심청전 같은 전기소설들을 입으로 줄줄 외웠다네. 초하루에는 청계천 제일교 아래에서, 초이틀에는 제이교 아래에서, 초사흘에는 이현에서, 초나흘에는 교동 입구에서, 초닷새에는 대사동 입구에서, 초엿새에는 종루 앞에 앉아서 외웠다네. 초이레부터는 거꾸로 내려왔다네. 아래로 내려갔다가 올라가고, 올라갔다 내려오면서 전기소설들을 외우고 또 외웠다네.”
“흥미롭군. 자네 생각엔 조수삼이 이야기책 읽어 주는 노인이었다는 뜻인가?”
벗의 질문을 일부러 외면한 그는 또 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냈다.
“이야기 주머니인 김옹金翁은 옛날이야기를 참 잘했다네. 듣는 사람이 누구건 배꼽을 잡게 만들었지. 핵심을 찌르고 말도 잘하는 것이 꼭 귀신이 도와주는 것만 같았다네. 그러므로 가히 재담꾼 중 으뜸이라 할 만했지.”
“자네 생각엔 조수삼이 재담꾼이었다는 뜻인가?”
그는 대답하는 목소리에 은근슬쩍 힘을 주는 벗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고 하지는 않았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이야기책 읽어 주는 노인과 재담꾼이 수박 파는 늙은이, 뱁새, 미친 선비, 나무 파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나?”
“뱁새와 미친 선비는 조수삼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 것이라네.”
“그렇다면 수박 파는 늙은이와 나무 파는 사람은?”
“그건 내가 가져다 붙인 것이지. 그 의미를 자네는 짐작하겠는가?”
벗의 역공이었다. 벗이 수박 파는 늙은이와 나무 파는 사람을 고른 의미를 처음엔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주고받고 『추재기이』를 생각할 만큼 생각한 지금은 벗의 선택의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수박 파는 늙은이와 나무 파는 사람의 공통점은 그들이 기로에 선 인물이라는 데 있다.
---「열 가지 재능을 가지고 하늘에서 귀양 온 사람」 중에서

이언진은 세상을 떠났다. 무심한 복사꽃이 만발하던 삼월 어느 날, 이 세상, 그에겐 감옥이나 마찬가지였던 조선에서 살아갈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며 세상을 떠났다. ‘시인’으로 살고 싶었으나 그저 ‘여항시인’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을 지배한 것이 과연 그러한 절망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결국 이언진은 ‘여항시인’이 아니라 ‘시인’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언진 스스로가 그렇게 만들었다. 무엇으로? 그가 쓴 시로.

바보도 썩고 수재도 썩지
흙은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를 안 가리니까.
나의 책 몇 권만이 내가 나를 천년 후에 증명하는 것.
--- 「하늘은 어찌하여 그의 나이를 연장해 주지 않았는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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