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는 언제나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소운이 생각 하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돌봐주는 사람이 없는 어린아이건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린 징그러운 지렁이건……. --- p.16
작은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난 빈 방파제 위로 유난히 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곧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가 무언가에 가로막혀 어딘가 다른 기이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그 길고 긴 울부짖음이 서서히 잦아든 것과 거의 동시에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방파제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왔다. --- p.26
거기에 방파제가 하나 있는데, 그 끝까지 걸어가서 발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바다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널 찾으러 올라온다는 거야. --- p.55
어쩌면 그것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어서 결국 아무것도 아니게 된 걸지도 몰라. 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순간 그게 곧, 바로 그들 자신이 되어버리는 걸지도. --- p.56
연호는 게임처럼 이 모든 것을 즐기고 있었다. 버튼을 조작 하는 것은 언제나 그랬듯 연호였다. 그리고 연호의 손가락이 내려앉는 곳을 따라 수많은 얼굴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무리 지어 움직였다. 그들의 목표는 딱 하나, 바로 진겸이었다. --- p.74
누군가 온몸을 사정없이 때리는 것만 같던 통증도 사라지고 나자 진겸은 마침내 찾아낸 완전한 고요 속에 가만히 떠 있는 기분이었다. --- p.83
끝을 모르는 어둠 속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리기 전에 진겸은 이제야 비로소 알 것만도 같았다. 결국 어떤 식으로든 소원은 이미 이루어진 셈이었다. 다만 결코 원한 적 없는 모습을 하고 나타났을 뿐. --- p.95
영의의 눈물이 천주의 뺨에 닿자마자 마치 무언가가 물기를 빨아들이듯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기쁨과 흥분으로 그리고 마침내 얻은 안도로 미칠 지경인 영의의 눈에 이상한 점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았다. --- p.132
네가 나를 부른 거야. 그리고 난 널 절대 떠나지 않아. 약속해. --- p.153
한때는 그 안에 오직 서로만을 담고 있으면서도 행복한 불안에 몸을 떨었던 두 쌍의 눈동자가 이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 없는 협박을 내지르며 상대의 가장 연약한 살갗 위로 성난 발톱을 휘둘러댔다. --- p.158
영의에게서 나는 천주의 냄새가 천주를 죽이고 있었다. 영의는 그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어쩔 줄 모르고 그저 울부짖는 천주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 p.186
핏줄이 모두 터져 나가 붉게 물들어버린 눈을 하고서 영의는 마지막으로 천주를 생각했다. 이제 영의에게 천주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와 똑같은 눈이 되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남자는 한때 자신을 향했던 영의의 그 기이한 사랑을 영영 알 수 없을 터였다. --- p.194
그들이 머물렀던 자리 위로 투명한 물 같은 무언가가 조금 고여 있다가 순식간에 사라져 공기 중에 반짝거렸다.
바다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올라와 인간의 욕망 혹은 소원을 풀어준다는 내용의 이 소설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선명하고 끝까지 읽게 만드는 스릴과 흥미를 골고루 갖추고 있다. 인물은 생동감 있고 스토리에는 군더더기가 없다. 소설을 이루는 세 개의 각기 다른 이야기가 긴밀하게 맞닿으며 수수께끼에 잠긴 ‘바다에서 온 존재’를 심연에서 끌어낸다.
- 김희선 (소설가)
문장력, 대화술, 소재 선택이 뛰어난 작품이다. 독특한 구성과 서술 방식으로 ‘그들’의 정체를 단단히 여몄다. 도움이 간절한 소녀의 삶으로 바다에서 온 ‘그들’의 테두리를 보여주고, 친구에게 지배당한 인물의 이야기로 ‘그들’의 질감을 드러냈으며, 죽은 연인이 ‘그것’이 되어 돌아온 마지막 이야기로 ‘그들’에 대한 미스터리를 키워냈다.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