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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는 말들

: 우리의 고통이 언어가 될 때

[ 제11회 브런치북 대상 수상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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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4년 06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308쪽 | 382g | 130*210*15mm
ISBN13 979116405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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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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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폭력적인 방식으로 어머니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었다. 이것은 어둠 속으로 추방된 자가 지상낙원의 세계에서 추방된 또 다른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다. 내가 추방되지 않았다면 결코 그녀의 이야기는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그녀는 나를 낳았지만, 나는 이제 그녀를 낳는다. 나는 그녀의 어머니가 되어 그녀를 빛의 세계로 밀어낸다.
--- p.7

2018년 5월 7일, 어머니가 자살했다.
--- p.14

어떤 죽음은 가능한 한 빠르게 지상에서 치워버려야 할 부끄러운 죽음으로 은폐된다. 내 어머니의 죽음이 그러했다. 어떻게 해서 한 여성이 살았던 67년의 생애가 그토록 한순간에 치워질 수 있는가. 장례식을 치르는 내내 그리고 이후로도 몇 년간 우리는 어머니를 제대로 애도할 수 없음을 조금씩 차차 알아가게 되었다. 그녀의 죽음은 ‘말할 수 없는 죽음’이었기에.
--- p.22

어머니의 부재가 주는 실감은 바다의 심연과 같아서 우리는 점차 희박해져가는 공기 속에서 한 줄기의 빛, 한 모금의 공기를 갈구하게 되었다. 그 부재가 주는 숨 막힘은 나로 하여금 진실에 대한 갈구와 열망으로 이끌었다. 어머니에 관한 진실을 재구성하고, 말하기 힘든 침묵의 행로에 숨통의 길을 내고 싶었다.
--- p.34

그것은 부재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내가 부재하는 당신을 사랑하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의 흔적과 유해를 낱낱이 그러모아 그 형상을 복원하는 일이었다. 당신의 형상과 지형도가 불완전한 미완성에 그친다 하더라도 나는 당신이 생의 광휘와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었음을 기억하고자 했다. 당신의 인생에는 오로지 비극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얘기하고자 했다. 당신이 그토록 쏟아지는 빛의 한때에 속했던 인간임을 말하고자 했다.
나는 당신이 가진 그 빛과 어둠, 모두를 보고자 한다. 당신의 빛을 집어삼킨 그 어둠의 실체를 밝음의 세계 위에 꺼내놓고 싶다. 당신의 정신을 기울게 했던 그 파멸의 기원을 추적함으로써, 한낮 여름의 빛처럼 부서진 당신의 열망들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 p.50

그 부끄러움은 어머니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나를 ‘배운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 비해 나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아는 자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의 교양 없음이 부끄러웠고, 수치와 분노와 슬픔을 거침없이 ‘세련’되지 못하게 표출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렇게 본능적인 방식으로는 어머니가 느끼는 분노와 슬픔이 결코 세상에 이해받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어머니는 평생 육체노동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나를 사무직 노동자로 끌어올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을 과연 계급 상승이라고 봐야 할까? 그러나 나는 그런 이상한 계급적 우위 속에서 어머니의 교양 없음을, 세련되지 못함을, 야성성을 미개하다고 생각했다.
--- p.86

나는 밤새도록 그 울음소리를 듣다가 어머니의 삶을 양지 위로 끌어내기 위해 동이 터오는 새벽이면 이 글을 쓴다. 새들이 울기 시작하면 그 울음소리는 금기의 벽을 뚫고 빛의 세계 위를 떠돈다. 그 떠도는 소리를 붙잡아 나의 단어 한 자 한 자에 그녀의 영혼이 실리기를 바라는 불가능한 염원이 나를 매일 책상 앞에 앉도록 한다. 어머니는 평소에 글이란 것을 전혀 읽지 않던 사람이었기에 그녀가 살아 있다면 이 글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부재하는 지금 이 글은 떠도는 울부짖음을 받아 적은 것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나는 그녀의 죽음을 통해 그녀의 삶을 재건하고 있는 셈이다.
--- p.103

어머니는 삶의 공허를 일깨우는 질문으로 나에게 비수를 꽂고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붓에 찍어 글을 쓰게 한다. 글을 쓸 때는 나는 내가 아니게 된다. 글을 쓸 때의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 놓인 영매의 심정이 된다. 누군가의 고통을 질료로 삼는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진실하지 않으면, 그 고통을 그대로 대변하지 않으면, 나는 상처나 고통을 전시하여 동정을 구하거나 피고름 나는 자기 상처를 핥고 또 핥는 무력한 변종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사람의 고통을 대변한다는 것은 과연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애초에 나는 불가능한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엎어지면서 앞으로 나간다. 마치 뱀이 기어가듯이. 뱀이 이 땅을 사랑해 대지를 기어가듯 나는 그녀를 사랑해 그녀를 위한 언어를 찾아 기어다닌다.
--- pp.118~119

나는 그녀의 폐허 위에 삶을 재건하려는 불가능한 꿈을 꾸었다.
--- p.120

나는 치욕스러울 때면 어머니를 생각했다. ‘나는 내 어머니가 이 세계의 치욕을 견디며 키워낸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려 보았다. 어머니는 자신의 결혼반지를 팔아 나를 대학에 보냈고, 나를 더 넓은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녀가 열네 살의 나이에 홀로 집을 나왔을 때처럼 그녀가 삶에 대해 가졌던 열망이 나를 더 먼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돛대를 펼치고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의 치욕을 견디는 방법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목숨을 담보로 지금의 내가 살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치욕에 무너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치욕은 우리 영혼의 품위를 시험한다. 그럴 때 자기 안에서 꽃을 피우는 것. 나를 살릴 그 꽃과 같은 존재의 기억들을 불러들이는 일. 그녀를 기억하는 일에서 나는 살아감의 상처에 연고를 바른다.
--- p.184

우리는 현재라는 씨앗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추위의 절정은 나의 씨앗이 진창 속에 있거나 길거리의 오물 속에 갇혀 있어도 내가 씨앗을 품은 존재임을 말해준다. 그 절정은 봄이 머지않았음을 예고한다. 계절은 흩어지는 눈발을 부수며 돌아온다. 이 부서진 것들을 안고 우리는 다시 돌아온다. 캄캄하게 내리는 눈들 속에서, 이 헐벗은 계절을 뚫고.
--- p.191

나는 당신을 왜 사랑하는지, 무엇이 당신을 고통에 빠뜨렸는지, 그 죽음마저도 나는 왜 사랑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시작된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가 질문하는 자로 변모되는 순간이다. 질문을 멈추지 않는 동안 살아 있게 된다. 질문함으로써 죽음을 유보한다. 폐허 위에 서서 질문으로써 씨앗을 심는다. 그 무수한 질문들이 내 삶에 뿌리 내리고 나무의 싹이 나고 숲을 이룰 때까지. 그 질문들의 뿌리는 사랑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한 나는 질문한다. 당신에 대한 끊이지 않는 질문이 나를 살게 한다. 나는 살아서 오래도록 당신에 대해 묻겠다. 당신이 살아 있을 때 하지 못했던 것. 그것이 내가 받은 천형이다.
--- pp.217~218

해녀들이 바닷속에서 숨을 참고 물 밖으로 나와 테왁에 기대어 숨을 뱉어낼 때, 그들이 껴안고 있는 테왁은 마치 하나의 알처럼 보인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작은 육신으로 하나의 알을 품고 그것에 기대어 삶을 살아낸다. 테왁은 그들의 목숨줄이고, 파도에 몸이 휩쓸릴 때마다 그들이 저승의 밑바닥으로 가라앉지 않게 지켜준다. 그들은 테왁으로 고통과 맞닥뜨리는 존재이다. 나에게도 테왁이 있다면, 그것은 글을 쓰는 일이 될 것이다. 매일의 물질이 매일의 글쓰기가 되어 삶에 대한 허무와 냉소로 가라앉지 않게 해줄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더 깊은 곳으로 잠수해 들어간다.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위해.
--- pp.249~250

나는 추방되었고, 내가 있던 곳에서 아주 멀리 떠나왔다. 그리고 새로운 정착지를 발견했다. 어머니가 나를 그녀의 세계에서 추방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새로운 땅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 p.286

멀리 떠난 밤배가 등대의 불빛을 향해 돌아오듯 나는 이곳에서 불을 밝히고 죽음에서 삶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당신에게 나는 조용히 속삭일 것이다. 살아내겠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듯, 소멸하는 나의 생과 모든 순간들을. 산 능선의 암흑을, 밤의 고독을, 짐승들의 울음을, 살아 있음의 고통을, 밤의 부엉이처럼 응시하며 앞으로 나아가겠습니다.
--- p.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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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평 추천평 보이기/감추기

쓰일 수밖에 없는 글이 있다. ‘나는 써야만 해요’ 부추긴 목소리에 의해 쓰인 글. 독자는 매혹된다. 사로잡혀 운다. 뛰고, 춤춘다.

제주에는 무아지경의 춤을 추게 함으로써 정신병을 낫게 하는 ‘두린굿’이 있다. 그 굿의 핵심인 ‘춤취움’처럼 조소연은 ‘글씌움’을 통해 금기가 된 죽음을 애도하고 파열된 마음에 손을 내민다.

이 책은 피의 언어로 어머니의 아픈 피를 씻는 제의이자 실성한 어머니와 상실한 딸뿐만이 아닌 모든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을 불러내 춤추게 하는 한판 두린굿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본다. 찔린 자궁에서 빛의 알로 깨어나는 말들을.

그러므로 『태어나는 말들』을 읽는 것은 ‘쓰기’가 어떻게 ‘낳기’이자 ‘낫기’가 될 수 있는가를 목도하는 일이기도 하다. 어머니와 딸, 이 영원한 근친적 타자의 죽음을 끝끝내 언어화함으로써 마침내 재건과 회복으로 나아가는 이 책은 여성의 글쓰기가 어째서 가장 유효한 애도의 방식인지를 보여주는 새로운 텍스트가 될 것이다.

조소연의 문제적 첫 책이 보여주는 쓰기의 관능과 권능, 이 미친 ‘씀’의 굿판에 당신도 어서 들어와, 같이 춤추자!
- 허은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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