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집 안에 들어와 보는 건 근 30년 만이다. 할머니까지 이 집을 떠나신 후 처음이다. 언제나 밖에서만 보고 갔을 뿐 안에 들어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내게도, 한옥집에게도 용기가 필요했고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오늘 이 시간은 이미 준비되어 있던 바로 그 순간이다. (……) 소리는 점점 커져 자매들의 웃음소리가, 속삭이는 비밀 얘기가, 그 시간들이 짙게 다가온다. 나를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와 한옥집의 여름과 한옥집 밤의 속삭임과 어린 나의 꿈들이. 막내를 부르는 할머니 소리와 친구들의 수선스런 목소리가, 언니들의 재잘재잘 소리가 들린다. 심장이 쿵쿵댄다. 기억이 회오리친다. 눈물이 차오른다. 사라지지 않았다. 사라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직도 내 안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던 곳. 그대로 존재하고 있던 이야기. 여기는 나의 원점. 나의 시작이자 나의 끝.
--- p.33
두고 온 삶을 뒤로 하고 이방인의 삶으로 살아가던 어느 날, 그저 이대로도 괜찮다 싶던 어느 날, 병이 도졌다. 아니 중병이 시작됐다. 가슴이 먹먹한 병. 그리운 게 많아서 죽을 것 같은 병. 보고픈 이들이 많아서 마음이 터질 것 같은 병. 코로나 때문에 마음대로 오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이 먼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하나, 글을 쓰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글을 써야 한다면 반드시 이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야 했다. 그 시절 내가 사랑했던 친구, 나의 한옥집에 대해. 이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는 다음 걸음을 내딛을 수 없을 것 같았다.
--- p.36
크리스마스에 뉴욕 맨해튼에 간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안 그래도 화려한 맨해튼의 야경은 불빛으로 더욱 화려해지고, 백화점 앞에 반짝이는 장식들은 세계 최고 디자이너들의 솜씨로 가히 장관을 이루지만 그 어느 것도 30여 년 전 한국의 작은 도시 공주에 생겼던 ‘아트박스’와 ‘바른손팬시’의 아름다움을 이길 수 있는 건 없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의 기억은 그리움의 색과 환상을 입어 아트박스도, 바른손팬시도 더 진한 동경 속에 자리하게 되었다. 지금 한국에도 여기 미국에도 그보다 훨씬 더 큰 문구점들이 많지만 나는 여전히 기억 속의 작은 가게를 떠올린다. 지금은 그 자리에 없겠지만, 소녀들의 설렘과 꿈과 두근거림은 아직도 그 자리를 맴돌고 있을 것이다. 여전히 그 자리에서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 p.219
하나의 다리가 내 세상 안에 들어오려면 적어도 몇 번은 두 다리로 건너고, 버스를 타고 수십 번은 지나며, 수백 번은 출렁이는 강을 바라보고 맛보아야만 한다. 그리하여 나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나의 이야기를 가득 품어줄 수 있어야 비로소 ‘나의 다리’가 되는 것이다. 금강철교과 금강대교는 여지껏 둘이었고 지금껏 둘인 ‘나의 다리’다. 공주를 떠난 뒤로도 지금까지 또 다른 다리가 추가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그만큼 원래의 존재가 소중하고 애틋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내 인생의 목록 중 하나에 함부로 무언가를 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p.243
내가 사랑하던 집. 나의 유년의 삶과 추억이 가득한 집. 나의 유년과 가장 찬란한 시간을 꽃피우고 우리를 사랑하고 보호해주며 스스로를 지켜온 집은 우리가 그 집을, 장독대와 그 오래된 나무를 버리고 나왔을 때, 스스로의 생애를 이미 마감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의 집이, 나와 옛 집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생명을 갖고 그리움의 색을 입기를 바란다. 사라진 옛집을 그리워하는 모든 이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살아 있기를 소망한다. 또한 나의 옛집이 지금 그 집에서 사는 이들과 함께 그의 새로운 생의 주기를 아름답게 가꾸어나가고 있기를 소망한다.
--- p.250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나는 수없이 많은 ‘어린 나’를 만났다. 작은 나를 찾아내서 그 아이를 한옥집 대문을 열고 들여보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저절로 그 아이가 집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다. 하나하나 문을 열고, 빼꼼히 쳐다보고, 대문 밖을 나와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아이가 가는 길은 나의 기억이 되었고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때론 눈을 감고 있어도 눈물이 났고, 눈을 뜨고 있어도 그곳이 보였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실제 만나는 듯도 했다. 꿈같기도 하고 환상 같기도 했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되살려내면서 나는 정말로 꿈 가운데, 환상 가운데 있었다. 돌아갈 수 없을 줄 알았던 유년의 시절 가운데 있었다.
--- p.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