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도대체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이제는 희미해졌습니다. 교정공이라는 직업도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바늘방석의 바늘들처럼 꽂힌 채 일터로 집으로 실려 가는 출퇴근길 나는 생각합니다. 바로 지금이 인류 역사상 상대적으로든 절대적으로든 최대의 읽고 씀이 이루어지고 있는 시기 아닐까?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또는 바로 그래서일지, 나 교정공의 일은 점점 희미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뭔가로 곧 교정공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쓴 사람 자신의 조심성으로, 아니면 무슨 검사기로, 발달한 AI로.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사실을 교정공들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굳이 대체할 필요도 없이 어차피 헐값이고…… 해 본 적도 없는 녀석들이 멋대로 말합니다. ‘교정이라는 일은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나 않으면 다행인 판국입니다. 실제로 교정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소리 높여 외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 이유를 대면서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꼭 인종이나 민족에 대한 욕을 들은 것처럼 흠칫 놀랍니다. 나는 청소당하는 걸까요? 그러나 내가 놀라는 진짜 이유는,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을 느끼면서도, 실은 마음 한편에서는, 그에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굳이 외치지 않아도 이 세계가 내 귀에 대고 그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필요하지 않다고요. 맞습니다. 나는 비밀스럽게 공공연하게 분명하게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딴 거, 나 같은 거, 교정공 따위는 필요가 없다! 너희 맘대로들 해! 그겁니다. 그냥 맘대로들 해…….
---「들어가며: 망해 가는 세상에서」중에서
내가 입사하기 전, 어떤 교수 녀석이 □□□이라고 틀리게 쓰려는 걸 끝까지 □○□으로 고치려다 대판 싸우고 퇴사한 교정공이 한 명 있었다고 들었다. 그는 단 하나의 자음을 옳게 고치기 위해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우리 같은 노동자들에게는 거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노동 그 자체를 걸었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은 그의 불굴을 생각하면 내가 지금 로써와 로서 따위에서 물러날 수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의 얼굴은 물론이요 이름도 모르지만 그는 오늘 무명용사 되어 내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잘못된 교정을 다시 옳게 되돌리며, 나는 그 무명용사가 왜 교수와 대판 싸웠는지 이해한다. 내가 겪은 일인 것처럼 이해한다. 그것은 글자의 옳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무명용사」중에서
교정교열자의 업무는 지옥에서의 밭 갈기와 같은 것이다. 아무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일을, 전혀 가능하지 않은 조건 속에서 감히 가능하게 하려고, 무한한 책임 영원한 책임으로 홀로 떠맡는 것이다. (……)
이 세상이 다 틀려도 내가 교정공으로서 딱 하나를 교정할 수 있다고 하면 ‘든과 던’이다. 든과 던을 모두 고치고 난 뒤, 욕심 많은 내가 눈물로 엎드려 제발 하나만 더…… 하나만 더…… 빌고 울고불고 손을 깨물고 발을 깨물고…… 그렇게 해서 하나 더 고칠 수 있다면 단연 ‘로써와 로서’다. 둘은 아주 다른 단어인데 또 많이 혼동된다. 끼새수교들 원고에서도 보면 백중팔십이 반드시 틀리고 넘어가는 오류 맛집으로서, 내 생각에는, 자기 노동에 있어 언어를 주요하게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이 정도는 기본적으로 구분할 줄 알아야만 한다. 나는 뭐 어려운 얘기까지 안 한다. 우린 야만스러운 저 교수 녀석들과 달라야 한다. 우리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로써와 로서의 구분」중에서
어쩌다 보니 그만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뭔가를 읽다가, 나도 뭔가를 좀 써 보고자, 약간은 자폭하는 심정으로 입학했다. 쓰려면 읽어야 했으므로, 실제로 읽건 안 읽건 학과 내에는 전체적으로 ‘읽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서로가 쓴 것을 수업 때도 수업이 아닐 때도 읽었다. 옹기종기 독서 모임도 했다. 우리는 대문호들과 동기선후배의 쓴 것을 나란히 읽었다. 무엇이건 비웃고 감탄하고 감동하고 지적하고…… 냉소적으로 되었다가 열렬히 옹호하고…… 뭐 그랬다. 졸업을 하고서도 거의 10년이 더 지나, 새내기 때 같이 독서 모임을 했던 선배이자 친구가 그걸 또 해 보자고 연락을 해 왔다. 독서 모임을. 일테면 인생이…… 허하다는 거였다. 나도 그랬다.
독서회라고 해 봤자 2주에 한 번 퇴근하고 만나 저녁을 먹고 읽은 책에 대해 가벼운 감상을 나눈 뒤 다음 읽을 책을 정하는 것이 전부다. 사실 책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그날 먹을 메뉴나 반주로 마실 고량주 생각, 끝나고 같이 코인노래방(학생 때도 엄청나게 다녔다.)에 가는 일 따위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이어져 어느새 한 해 두 해 세 해째로 접어들었다. 사실 나는 이제 쓰는 인간들이라면 지긋지긋하다. 머릿속이 까매질 때까지 교정을 한 다음 또 뭔가 읽는다는 것도 현기증 나는 일이다. 그렇지만 먹었으니 싸는 것처럼 또 이런저런 감상문을 남기면서, 학생 때 그렇게도 떨쳐 내기 어려웠던 질문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쓰는가? 왜 읽는가?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읽고 쓰게 하나?
---「독서, 모임」중에서
네이버 블로그 녀석들이 자꾸 무슨 영상을 찍어 올리라느니 사진을 찍어 올리라느니 아주 위험천만한 자기판매를 포맷까지 딱 만들고 돈까지 쥐여 주겠다며 자꾸 시키는데, 진짜 토가 나온다.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한테 여러분들 이거 보셔요 저가 일기를 썼ㅡㅂ니다 저의 오늘 하루는 이랬고 저랬고 저는 이런저런 생각을 햇ㅅㅂ니다 보여 주는 거? 말할 것도 없이 재밌는 일이다. 쓰기뿐 아니라 읽기도 재밌다. 비슷한 얘길 전에 했지만, 세상의 재밌다 하는 일들이란 다 위험한(악의 그림자가 서려 있는) 짓이고 그만큼 조심해야 할 일이다. 읽는 이에게나 쓰는 이에게나 그렇다. 나는 그 일에 요구되는 종류의 조심스러움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중요한 미덕이라고도 생각한다. 그게 무슨 미덕이냐? 그것은 ‘사람을 존중하기’의 지하에 있는 미덕이다. 어디서 누가 제대로 가르쳐준 적 없는 미덕, 몸통 박치기로 익히는 수밖에 없는 미덕, 도저히 간단치가 않은,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특히 읽고 쓰기를 이제 필연으로 맞이한 우리에게…… 그 미덕은 ‘사람을 사용하기’와 관련 있는 미덕이다. 자신을, 또는 타인을. 그런 면에서 내 생각에, 공개된 일기는 현시대의 최고로 문제적인/지배적인 문학이며, 병성과 치유가 함께 고이는 곳이고, 해석되길 기다리고 있고, 변화되길 기다리고 있고, 어쩌고저쩌고…… 이는 우리가 전자레인지나 정치의 사용법을, 차 타지 않고 차도로 들어가는 여러 방법을 익혀야 하는(익히게 되는) 것과도 같다. 우리가 실로 서로의 길고 짧은 일기와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하여튼 많이들 조심스럽게 읽고 써 보셨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생각이며, 이는 네이버 블로그 팀의 토 나오는 기획과도 어느 정도 일치하는 바다. 같이 갈 수 있는 데까진 같이 가고, 챙길 수 있는 오까네는 일단 챙기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수칙이다. 2주간 매일 일기를 쓴다는 것은 쉽진 않지만 해 볼 만한 일이다. 블로그 에디터에도 카페처럼 투표 템플릿이 도입되면 좋겠다. 챌린지로 받을 만육천원 상당의 포인트를 어디에 쓸 것인지 정할 수도 있을 테고……
(1) 사회운동 기부
(2) 취미생활에 사용
(3) 생활비로 사용
(4) 기타……(댓글로)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나머지를 청구할 것이다. 그것이 이 개짓거리를 함께하며 내가 여러분과 하고 싶은 약속이다. 우리의 경험은 만육천원은 물론이요 천만금으로도 구매할 수 없으며, 네이버는 언젠가 상상도 못한 방식으로 제값을 치러야 할 것임을……
---「오늘일기 챌린지: 2021년 4월 30일」중에서
한국전이 끝나던 때 광주, 좌우익에 대한 상호린치의 여파로 태어나자마자 자신의 아버지를 여의고 성인이 될 무렵 상경한 이래 수십 년간 플라스틱 사출 공장에서 일해 왔으며 동남아시아 노동자 동료들과는 사이가 좋고 중국은 싫어하는 나의 아버지. 그에게는 어느 정치인이 똑똑한가 안 한가가 중요한 판단 준거다. 적어도 설득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일테면 뭐 저 사람은 서울대를 나왔느냐 아니냐, 대학은 어디 대학 나왔느냐…… 전에 나한테 우리 당 대표가 똑똑하냐고 물어봐서 ‘인성이 좋다’고 답한 일이 있었다. 이쪽(?)은 그 사람이 똑똑한가 안 한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 그 연구소가 있고 정책으로다가 하는 거니까는…… 그런 얘기를 멍청하게 덧붙이다가 ‘어딘 안 그러냐’ 해서 힘이 빠졌었다.
서산 시골 소녀 시절,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혼자 베틀 앞에 앉아 쪼가리를 짜 봤다가 수재 소리를 듣고 역시 성인이 될 무렵 상경해 생의 반 정도는 미싱을 돌려 옷가지를 만지고 또 반 정도는 요양보호사로서 노인과 환자들을 돌보며 조선족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어쩐지 호의적이면서도 근처에 무슬림 회당이 들어서는 건 매우 경계하는 나의 독실한 어머니. ‘ㅇㅅㅇ을 찍느니 차라리 ㅅㅅㅈ을 찍으시라’ 했을 때 어머니는 ‘ㅅㅅㅈ은 어쩐지 깡패 같아서 싫다’고 답했다. 이유가 재밌지 않은가? 깡패 같아서 싫다고. 그러면 내가 뭐 할 말 있나? ‘ㅅㅅㅈ이 그래도 융통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냥 등신 같은 소리 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옆에서 어쩐지 실드를 쳐 주는데(‘이쪽’ 찍은 적은 없어도, 어쨌든 편은 들어줌), 그럴 때 꼭 ‘그래도 ㅅㅅㅈ이 똑똑하다’고, ‘그래도 똑똑해’ 이러면서 실드를 친다. 그래 ㅇㅅㅇ을 찍느니 ㅅㅅㅈ을 찍어라 맞장구를 치면서. 그런 아버지는 ㅇㅈㅁ을 찍었고 기본소득에도 꽤 공감을 표하는 편,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제 점점 살 방법이 없다는 거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는 이는 당연히 알 것이다. 그걸 모르는 이들과는 나부터가 이야기하기 어렵다. 방법이 없어 뵌다고 개새끼들아!1 (……)
나, 부모님을 호강시켜 드리기는커녕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문학을 배우겠다고 대학에 가서 교정공이 된 내가, 두 사람의 일을 이렇게 팔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은 뭐냐면, 참으로 우리가 우리를, 노동계급을 설득하려면, 지옥 같은 노동과 신성한 노동을 함께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2023년 1월 18일」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