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만나고 ‘이 사람이 내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들면, 나는 그에게 나만의 징표를 새긴다. 그의 전화번호를 애칭 으로 저장하는 것. 오랜 시간 함께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생기는 그 사람에 대한 느낌이, 켜켜이 쌓여 오직 나만이 부르는 유일한 이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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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선택한 건 여행이었다. 나에게 여행은 늘 누군가를 알아가는 수단이었으니깐. 생판 모르던 남부터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스스로까지, 언제나 여행을 통해서 알아갔다. 여행이 그런 수단이 되었던 건, 낯선 공간이 주는용기 덕분이었다. ‘여기서 너를 아는 사람은 없어. 너 마음대로 해봐. 조금 더 걸어가봐’ 여행은 그렇게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낯선공간이 주는 묘한 용기와 격려. 이번에도 그렇게 말을 걸어올 것만 같았다. 용기를 내서 동생의 마음속으로 걸어가 보라고. 지금껏 살아오면서 한번도 마주하지 않았던 그 낯선 공간으로 나에게 처음 용기를 주었던 그곳이라면 동생의 마음속으로 한 발자국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치앙마이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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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곳. 그럼에도 느슨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곳. 치앙마이에서 나는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온전히 나에게 집중한 채, 나도 모르던 나를 알아갔다. 가령, 더운 것을 끔찍이 싫어한다 했지만, 치앙마이에선 40도가 육박하는 더위에도 느긋이 길을 걷고 있는 나를 발견하거나, 맥주를 싫어한다 했지만 숙소에 돌아오면 조용히 맥주를 꺼내 한 모금 들이켜는 나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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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는 천천히 느린 속도로, 나 스스로를 알아 가도록 만든 곳이었다. 내가 누군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그렇게 눈부신 햇빛 속을 느리게 걸어가며 나의 소리를 들었다. 내가 어떤 마음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느하나 귀 기울여주는 사람 없었지만, 거기엔 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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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랐던 내 모습을 알게 되어 나를 더 사랑하게 된 것처럼, 동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어졌다. 말로만 핏줄이라고 하는게 아니라. 그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사랑으로. 그렇게 동생을 데려오겠다 다짐한 순간 이 치앙마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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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전혀 다른사람인 줄 알았던 서영이가, 나와는 전혀 공감대가 없을 거라 단정 지었던 서영이가, 생각보다 나와 비슷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나와 마찬가지로 일몰을 좋아했고 야경을 좋아했고 액티비티를 좋아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흔한 취향이라도, 나와 공통점이 없을거라 생각했던 상대에게서 나온 대답은 그 흔한 취향도 특별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일몰을 좋아한다는 서영이의 말을 들었을 때 몬 쨈을 떠올렸고, 야경을 보고 싶다는 말에 도이수텝을 가야겠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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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되면서 내게는 솔직해질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가 생겼다. 하나는 돈이 좀 드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비해 저렴한데 단점이 있다. 단점이 꽤나 치명적이다. 솔직하다 못해 이불을 발로 걷어차게 만드는 찌질한 모습까지 드러내게 된 다는 것인데, 저렴해서인지 아니면 찌질한 모습을 은근히 즐기는지, 나는 두번째 방법을 애용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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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알고 싶으면 함께 여행을 떠나라.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문구가 인생의 진리라고 느끼게 된 것은, 성인이 되고 처음으로 친구와 단둘이 해외여행을 갔을 때였다.
인터넷에서 보았던 ‘친구와 여행 후 관계를 끊게 됐어요’ 와 같이 심각한 사건은 아니었지만, 멋모르고 떠났던 둘만의 여행은 우리 관계의 변곡점이 되었다. 잠자는 시간 말고는 거의 붙어있는 고등학교에서, 친구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다고 자신했지만, 그건 학교 안에서 만이었다. 학교라는 틀이 없어진 곳에선 우리는 꽤 달랐고 자유로웠으며, 자유는 곧 우리가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질 수 있음을 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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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함께 하면 서로의 본 모습을 알게 된다는 것은 이번 여행에서도 진리로 통했다.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서로의 본 모습은 멀어지게도 만들지만 때로는 가까워지게도 만든다는 것. 인생의 진리가 하나 더 생겼다.
--- p.93
서로 한마디씩 주고 받는 게 재미니깐. 다시 못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갇혀 여행의 재미를 잊지 말길. 기억하자. 서로의 농담이 더해진 시장 구경이야말로, 일요일 늦잠을 포기하기에 충분하다.
--- p.105
궁금하던 머릿속 질문의 답은 행복하게 춤을 추는 원숭이였다. 잘 추진 않지만, 행복하게 출 줄 아는 원숭이.
그거면 됐다. 무작정 엉덩이를 흔들었던 춤의 이유는 행복한 나를 보여주는 것이었으니깐. 아쉽다면 다음에는 같이 행복하게 춤추는 원숭이가 되지 않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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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히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활동들을 많이 한다는 것. 운동이나 게임이나 쇼핑. 지극히 평범한것이자, 위대한 것. 여행 덕에 관계의 소중함을 느꼈고 그 덕에 일상의 소중함을 느낀다. 이게 바로 여행의 선순환 아닐까. 나의 독재가 끝이 보인다. 기나긴 독재를 버텨준 서영이에게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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