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진을 봐주셨으면 합니다.” 율리아 앞의 테이블에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PG가 말했다. 율리아가 휴대폰을 들고 화면에 뜬 사진을 보자 PG의 얼굴에는 극도의 불안감이 드러났다. 사진이 찍힌 시각은 어젯밤 23시 25분이었지만, 촬영 장소를 보여주는 메타데이터는 없었다. 플래시를 환하게 터뜨린 사진 속에서 한 남자가 결박된 두 손을 무릎에 얹은 채 벽돌 벽에 등을 대고 콘크리트 바닥에 힘없이 앉아 있었다. 체크무늬 셔츠가 말려 올라가 뱃살이 드러났고, 바지의 사타구니 부분은 주름으로 쭈글쭈글했다. 머리를 덮은 갈색 포댓자루 한쪽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가슴과 배를 타고 흘러내린 검은 피가 벌어진 다리 사이에 고여 커다란 웅덩이를 이루었다. 사진이 선명하지 않다 보니 피가 응고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인하기 어려웠다. “오늘 아침 제 휴대폰에서 이 사진을 발견했습니다.” --- pp.20~21
만하임이라는 이름이 금색 글씨로 새겨진 화려한 주철 아치 아래 대문이 열려 있었다. (…) 방향을 틀어 또 숲길을 달리고 있으니 나무 몸통 사이로 반짝이는 작은 강이 언뜻 보였다. 나무로 지은 외딴집과 창고도 드문드문 차창을 스쳐 지나갔고, 다시 한번 풍경이 확 트이며 초원과 들판이 나왔다. (…) 도로는 웅장한 저택의 진입로로 이어졌다. 경사진 검은색 지붕을 얹은 집의 매끈한 벽돌 벽을 따라 양쪽으로 열리는 유리 창문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자갈을 아주 고르게 깐 진입로는 잘 관리되어 있었고, 그 끝에 위치한 원형 선회로 옆의 잔디밭에는 화강암 해시계도 있었다. --- pp.41~43
“만하임 있잖아… 굉장하더라.” 시드니가 말했다. “과하다는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대단하지.” “그런데 말이야… 겨우 하룻밤 있었는데 벌써 약간의 폐소공포증이 느껴지려고 해.” “나도 잘 모르겠지만 상속 때문인 것도 같아.” 율리아가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뻗으며 말했다. “일주일에 한 번 억지로 모여 앉아야 한다고 한탄하면서 꼭 말벌처럼 행동하잖아. 유리 덫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처럼 말이야.” “모두를 위한 설탕물인 거네.” 시드니가 빙긋 웃었다. “그런데 또 서로를 증오하고.” --- p.97
앞에 은색 별 장식이 있는 작은 카우보이 모자, 꼬리를 씹은 자국이 있는 플라스틱 티라노사우루스, 액션 피규어, 파란 스머프 인형들로 가득한 통도 보였다. 50년 전 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장난감들이었다. 율리아는 미닫이문으로 돌아오며 만하임에 어린아이나 청년이 없다는 기이한 사실을 떠올렸다. 집은 온통 고요했고 조각 마루가 온도 변화에 반응해 작게 뒤틀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호두 껍데기를 바닥에 떨어뜨리는 소리 같았다. --- p.211
변호사가 목을 가다듬었다. “그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젠가 내 영혼을 훔친 편지를 읽은 적 있다.’” 순간 식탁에 정적이 흘렀다. “저게 뭔 개소리야?”
잘 짜인 미로 같은 소설이다. 술에 취한 사이 저질렀을지도 모르는 살인 사건. 시신은 없고 사진만이 남았다. 흔한 소재라고 생각했다가 당신은 뒤통수를 맞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꽤 기분이 좋은 충격일 것이다. 이야기는 강력하고 빠르게 당신을 끌어당긴다. 탐정을 이기기 위해 눈을 홉뜨고 경계를 하기보다는 외적으로는 약자에 속할지라도 스스로를 일으킬 줄 아는 강인한 탐정 율리아가 안내해주는 미스터리 세계를 따라가며 충분히 즐겨보시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