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에는 외할머니가 비벼 준 간장밥이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나는 자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서 그 밥을 먹지 않고 바라만 보았다. 외할머니가 다시 집에 돌아오면, 그 밥을 보란 듯이 맛있게 먹고 싶었다. 하지만 외할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 p.12 「외할머니의 간장밥」중에서
아마도 그날, 아이들은 누구 이야기가 진실인지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누구 이야기가 더 재밌는지 투표를 했고, 내가 졌던 것 같다. 더 재밌는 건 그날 이후 극장에 새 영화가 개봉할 때마다 영화를 봤다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아이들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풀었다는 것이다. 같은 제목이었지만 아이들마다 주인공과 장르와 주제가 달랐다. 이야기가 모두 끝나고 나면 꼭 투표를 해서 누가 승자인지 가렸다. 모두가 관객인 동시에 창작자였다. 아무것도 없었기에 오히려 무엇이건 만들어낼 수 있었던, 우리만의 상상의 극장이었다.
--- p.23 「영웅본색과 상상의 극장」중에서
병원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한동안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아버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올라가서 의사 선생님한테, 며칠만 더 있다가 와도 되냐고 여쭤볼래?”
홀로 계단을 오르며, 아버지의 표정이 왜 그토록 어색했는지 깨달았다. 아버지는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었다. 치과 입구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다시 내려갔다.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좀 더 상태를 지켜보고 금니를 씌우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하시는데….”
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또다시 헛기침을 하며 길을 나섰다. 나도 헛기침을 하며 아버지를 따라갔다.
--- p.31 「어색하지 않아 다행이야」중에서
“너는 장례식 때는 작은 옷을 입고, 사십구재 때는 큰 옷을 입고, 네 아버지 웃기려고 작정을 했냐!”
그 말에 어머니도 나도 동시에 빵 터졌다. 분명 계속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또 눈물이 났다. ‘내가 아버지를 이렇게라도 웃겨 드리는구나. 살아생전 한 번도 못 웃겨 드리고, 저 멀리 가시고 나서야 웃겨 드리는구나.’ 함께 걸어가던 스님은 갑자기 웃다가 갑자기 우는 어머니와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씀하셨다.
“오늘이 지나면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향하시는데, 이렇게 웃겨 드렸으니 가시는 길이 심심하지는 않겠네요. 참 웃기는 아들이네요.”
그랬다. 살아 계실 때는 못 웃겨 드리고 떠나실 때가 되어서야 웃겨 드리는 나는, 참 웃기는 아들이었다.
--- p.64 「웃기는 아들」중에서
좋은 책을 읽으면 가방에 넣어 다니다가 친한 사람에게 불쑥 건네곤 한다. 그 책이 누구에게 가장 어울릴지 상상을 하면서. 그 생각을 하며 가방에 책을 담으면 하루 종일 두근거린다. 좋은 사람에게 좋은 책을 선물하고 싶어서,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나는 오늘도 책을 읽는다. 책 한 권을 읽으면 사람 한 명이 생겨난다는 믿음을 가지면서.
--- p.99 「책 한 권, 사람 하나」중에서
한 위대한 배우가 일 막을 마친 후, 분장실에서 삶의 마지막 숨을 쉬고 떠났다. 다음 날, 배우들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분장을 하고 등장인물이 되어 무대에 섰다. 공연이 끝나고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는 순간, 눈물이 분장을 지웠고, 그들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그 위대한 배우에게 보내는 최고의 예우였다.
--- p.110 「분장실에서」중에서
앙상블 배우들이 어둠 속에서 카메라를 들고, 셔터 불빛으로 주인공을 비춰 주는 장면이었다. 이 프로듀서는 그때 확연하게 보았다고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주인공을 향해 열심히 빛을 비추며, 그 누구보다 가장 열심히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A의 모습을, 그리고 그 어둠 곳곳에서 마찬가지로 뜨겁게 노래하고 춤추고 있는 B, C, D, E의 모습을. 이들에게는 아무런 조명이 비치지 않았지만, 그 짧은 몇 초 동안 가장 눈부시게 빛났다고. 그 찰나의 몇 초가 흐르는 동안, 연습실에서 보았던 이들의 모든 노력이 무대 위에서 눈부시게 흘러갔다고. 그 눈부심 때문에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어둠 속에서 노래하는 배우들의 얼굴 하나하나가 모두 떠올라서, 그 얼굴이 너무 눈부셔서, 나도 덩달아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 p.128 「어둠 속에서 더 빛난 앙상블」중에서
십 년 넘는 시간이 흘렀고, 고양이들은 중년이 되었다. 고양이의 일 년은 사람보다 빠르다니까, 어쩌면 벌써 내 나이를 넘어섰는지도 모른다. 나는 예전에, 내가 태어난 이유 중에 하나는 이 두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이제 생각이 바뀌었다. 이 두 친구가 태어난 이유 중에 하나는, 나를 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양이의 목숨이 아홉 개라던데, 어쩌면 그중 하나를 나한테 주었는지도 모른다.
--- pp.143-144 「어쩌면 이 고양이, 날 구하러 온 건지도 몰라」중에서
세혁아 너무 놀라지 마라.
어느 봄날, 이모들이 우르르 찾아와 꺼낸 첫마디였다. 엄마 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그때 엄마는 환갑을 앞두고 있었다. 환갑 축하로 잔치 대신 결혼을 택한 거였다. 멋있었다. 아, 엄마가 나보다 먼저 가는구나. 분발해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엄마 결혼식을 준비했다.
문제는 내가 결혼식을 치러 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 p.145 「엄마의 결혼식」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