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저녁 있는 삶’을 산다. 언제 퇴근하나 눈치 볼 상사나 한숨 나오는 야근도 없는, 나는 전업주부. 토끼 같은 아이와 집에 머문다. 그런데 우울하다. 밥하고 먹고 치우고, 아이 씻기고 책 읽어 주고 잠재우고, 그런 일의 끝없는 도돌이표. 똑같은 저녁이 반복된다.
어떤 날은 괜찮다가도 어떤 날은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말. “지겨워.” 앞이 꽉 막힌 것 같다. ‘엄마’라는 호칭에 붙박여 살게 될까 봐 두렵다. 남편과 아이 뒷바라지로 끝나는 삶. 그렇게 늙어 나를 정의할 이름이나 일 하나 갖지 못할까 봐. 지금은 부엌에서 한숨을 토해내고 있지만, 여기가 끝이 아니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예상되는 결말에서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이야기를 향해 갈 힘, 다른 세계를 상상할 힘을 구한다. 보이지 않고 들은 적 없지만 어디선가 쓰였고 지금도 적히고 있을 이야기, 태어나길 준비하는 이야기를 찾아 헤맨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삶에 이어붙일 또 다른 패치워크가 있다고 나를 다독인다. 상상하길 멈추지 않는다.
--- pp.60-61
올해는 이르게 장마가 시작되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에 휘낭시에를 구워 볼까 생각한다. 진한 커피 한 잔과 휘낭시에가 잘 어울리는 날씨. 달걀 흰자만 휘핑하고 버터를 태워 넣은 후 아몬드 파우더와 코코아 파우더, 슈거 파우더를 섞어 반죽을 만든다. 진한 버터 향과 쫀쫀한 식감이 매력적인 휘낭시에. 코코아 파우더를 넣은 초콜릿 휘낭시에에 새콤달콤한 오렌지필을 올려 색과 맛을 더한다.
원두를 갈아 커피를 한 잔 내리고 오렌지필이 보석처럼 빛을 내는 휘낭시에 조각을 한 입 베어 먹는다. 아이와 처음 원두를 사러 갔던 그날의 저녁 길과 달달해서 마들렌보다 휘낭시에가 더 좋다던 아이의 혀 짧은 목소리가 내 안에서 플레이된다. 내 안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이 모여 살까. 우리를 풀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감겨 있을까.
모을 수 있다면 ‘휘낭시에처럼 농도가 진한’ 시간을 모으고 싶다. 진심을 다해 달리기를 하던 시간이나 세 식구 좋아하는 생선구이에 젓가락과 포크를 동시에 들이대며 나누어 먹던 순간, 바닥에 엎드려 함께 동물 흉내를 내며 배꼽 빠지게 웃던 찰나나 노느라 열을 올리는 사이 아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손등으로 쓸어 주던 밤처럼. 시간을 무언가로 대체할 수 있다면 아이의 티 없는 웃음소리의 메아리, 반짝이는 눈동자의 빛이나 열기에 뜨거워졌다 식으며 차가워진 살결의 감촉, 깨끗이 비워진 접시 같은 것이면 좋겠다.
--- pp.96-97
“우와, 치즈 냄새가 불쑥 나잖아!” ‘불쑥’이라는 말이 어색하면서 재미있다. 느닷없이 닥친 강렬한 냄새를 표현하기엔 더없이 잘 어울리는 말. 그 말이 좋아 여러 번 따라 해 본다. “정말, 치즈 냄새가 불쑥 나잖아. 불쑥, 냄새가 나네!” 작고 둥그런 피자가 치즈 냄새를 퍼뜨리자 집안 분위기도 순식간에 떠들썩해진다.
혼자 누리는 고요가 아닌, 둘이 혹은 셋이 어우러지는 소란이 지금의 나를 버티게 한다. 홀로 약해진 대신 함께 튼튼해지는 법을 배운다. 감추려 했던 나의 연약함을 알아채고 인정하면서 서로에게 기대는 법을 익힌다. 홀로 이겨내려 함부로 외로워지는 대신 마음의 둑을 무너뜨려 차라리 허물어지기도 하면서. 내게 누군가의 품이 간절하듯 나도 내 가슴을 누군가에게 한없이 내어 주고 싶다. 혼자서 꿋꿋해지려 주먹을 쥐었던 시절을 건너, 혼자이길 바라 들끓는 나를 통과해, 남편과 아이와 뒤엉켜 웃기고 어설프지만 유연한 나를 향해 간다.
저녁마다 아이를 가운데 두고 남편과 내가 나란히 누워 아이의 얼굴과 손을 쓰다듬고 팔과 다리를 주물러 주다 서로의 몸을 포갠다. 우리 사이로 사랑이라는 물결이 소리 없이 오가는 순간이, 혼자가 아니라 셋이라 가능한 저녁이 소중하다. 아이가 나의 머리를 쓸어 주고 어깨를 주물러 주고 귀를 꼭 감싸 쥘 때 연약한 동물처럼 나를 맡긴다. 내 안에 숨어 있는 아이의 마음, 여물지 못한 속살을 드러낸다. 어른도 슬프게 걸을 수 있단다, 언젠가의 내게 뒤늦게 말을 건넨다.
--- pp.77-79
잠든 아이를 들어올려 소파로 옮겼다. 아이는 몸을 움직여 자세를 잡는가 싶더니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이의 눈꺼풀이 내려와 기다랗고 까만 속눈썹을 볼 위로 드리웠다. 도토리를 머금은 다람쥐처럼 볼록한 볼이 말개졌다. 둥지를 틀 듯 동그랗게 말아 누운 몸 위로 잠의 베일이 덮였다. 아이의 실루엣을 따라 팔을 둘러 울타리를 만들고 잠든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 보일러를 틀었다. 방에 있던 가습기를 거실로 들고나왔다. 서서히 바닥에 온기가 돌고 가습기에서 물 끓는 소리와 함께 증기가 피어올랐다. 고요가 내린 거실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선율이 가볍게 맴돌았다.
그때의 고요는 아이가 없을 때의 정적과는 다르다. 적막이 아닌 온화한 정온. 꿈결로 빠져드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다 알수 없는 충만함에 젖어 들었다.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삶을 인심 좋게 사용하는 일이라는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아이는 사치스럽게 삶을 쓴다.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지시를 있는 그대로 따르면서. 배가 고프면 먹고, 힘들면 울고, 졸리면 고꾸라지듯 잠든다.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즐거운 놀이로 채우며 아낌없이 써버린다. 아이는 가난한 내 삶에 찾아와 빈 곳에 이미 가득한 생(生)을 알려 준다.
--- pp.85-86
당시의 내겐 회사원들처럼 시간을 채워 앉아 있어야 하는 사무실도, 마감을 지켜 끝내야 할 업무도 없었다. 경제 활동을 하지 않는 대신 그만큼 자유로웠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 매여 있지만 마음먹기에 따라 유동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뜻하는 일에 몰두하기 어렵고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으니 삶을 낭비하고 있다는 불안이 수시로 몰려왔다. 남들이 인정해 주는 일을 하며 경력을 쌓고 싶어 조급증이라도 일면 자신이 한없이 무능하게 여겨져 우울했고. ‘이 시간은 무엇이 될까…….’ 막막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스스로에게 묻고는 했다. 그랬는데, 놀이터에 있던 그 오후에는 이런 확신이 내게 왔다. ‘이런 게 진짜 삶이지!’
나도 모르던 내 안의 내가 그렇게 외쳤다. 오후 2시의 햇살과 바람, 대기를 채운 나른한 감각, 무릎 위에서 웃음을 피어올리는 아이의 명랑함, 그 모든 걸 온전히 누리는 게 진짜 삶이라고. 오직 한 번, 지금 이 순간 존재했다 사라지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삶의 기쁨을 두 손 가득 받아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내가 견디는 시간에 대해 삶이 건네는 보너스 같았다. 삶이라는 무대의 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구석에 있지만 그런 내게도 삶은 귀한 걸 나누어 준다. 무대 위나 앞에 있는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자잘한 기쁨이 보너스처럼 내게 온다. 그러니 두둑한 월급이나 잘나가는 커리어가 없더라도 삶의 맨얼굴을 알아보고 웃을 수 있는 지금의 내 삶도 괜찮아 보였다. 나와 아이, 포개어진 다리와 손, 나란한 걸음 사이로 쌓이는 다정의 가치를 더 믿어 보고 싶었다.
--- pp.110-113
아이와 같이 만든 불고기를 식탁 가운데에 놓고 하얀 밥 호호 불며 저녁을 먹는다. “내가 만들면 더 맛있더라!” 아이의 호기로운 말에 나와 남편은 웃음을 터뜨린다.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하루 안에도 배우고 축하할 것이 너무나 많다는 사샤 세이건의 말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나와 아이는 꾸준히 배운다. 작은 일을 거듭하며 기쁨을 찾고 평범한 하루가 건네는 아름다움을 축하한다. 이런 생활이 아이에게 재밌고 신선한 재료가 되어 줄 것이다. 자기만의 삶의 레시피를 창조하기 위해 지금은 다채로운 재료로 마음껏 놀며 연습하는 시기. 나는 아이가 맛볼 수 있게 각양각색의 재료를 보여만 줄 것이다. 그것들도 아이 손에 닿으면 아이만의 레시피로 변형될 테니까. 그런 과정에서 ‘재미’를 발견하고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품게 되길 바란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알아채고 하염없이 그걸 따라가 보면서, 남들이 뭐라 하든 내가 좋아하는 사소하고 사적인 순간을 소중히 모으면서. 그래도 괜찮다고, 그것들이 너를 네가 되게 해 줄 거라고 속삭여 줄 것이다.
사는 동안 그 재료로 마음껏 시도하고 탐험하며 너만의 레시피를 써 나가길 바라. 자신만이 알아볼 수 있는 슬픔과 기쁨, 경이와 감탄으로 삶의 의미를 새겨 나가렴. 너만의 레시피로 너는 네가 될 거야.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모아 너라는 삶의 레시피를 채워 가렴.
--- pp.179-180
오늘도 운동장을 다섯 바퀴 달리고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좋아하는 일에 오롯이 빠져들면 더이상 나라는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나를 바라봐 주길 바라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대상과 세계를 바라볼 수 있다. 그렇게 나를 제외한 세계로 시선이 옮아간다. 자신을 빼고 일상의 풍경을 담은 사울 레이터의 사진처럼 내 글에도 타인의 삶이 조금씩 들어온다. 사울 레이터와 유사한 면에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좋아한다. 그의 영화에는 약점을 극복해 가족과 세계를 구하는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타인 때문에 상처를 받고도 금세 다른 사람을 찾아 나서는 나약한 인간들이 있다.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길을 걷다 마주칠 법한 구질구질한 세계가 스크린 위로 펼쳐지는데 뜻밖의 장면에서 코끝이 찡해지고 불현듯 찬란함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건 감독인 그가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결핍은 결점이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세계는 불완전한 그대로, 불완전하기 때문에 풍요롭다고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남편과 같이 보고 많이 좋아했던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특별하지 않고 어리숙하지만, 모두가 저마다의 모습으로 사랑스러워 보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영화는 등장인물들 각자가 가슴에 크고 작은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기적이라고 말한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세 살인 딸이 열 살이 되었을 때 보여 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했다. 세계는 풍요롭고, 일상은 있는 그대로 아름다우며, 생명은 그 자체로 ‘기적’이라고, 딸에게 말을 걸 듯 만들었다는 그의 말에 이 영화가 더 좋아졌다.
영화를 만드는 감독만이 아니라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생각을 가지면 어떨까. 불완전한 채로 세계는 풍요롭고, 일상은 아름다우며, 생명은 모두 ‘기적’이라고. 나도 딸에게 그런 메시지를 전해 주고 싶어 글을 쓴다. 각양각색의 존재들이 살아가는 지금, 이토록 사소한 오늘 하루가 기적이라고. 그러기 위해 일상의 소소한 장면을 응시하고 가까이에서 벌어지는 놀라움과 애틋함을 글로 채집한다.
--- pp.221-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