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온다는 것은, 서퍼에게는 다른 계절보다 조금 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에서 ‘서핑=물놀이=여름’이라는 공식이 자연스럽게 연상되어서이기도 하지만, 입을 때도 벗을 때도 한참을 씨름해야 하는, 고마운 것은 분명하나 답답한 이 슈트를 벗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답답한 슈트를 벗고 나면 패들링도 더 잘될 것만 같고, 파도도 더 많이 잡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생각만 그렇다고 해도 상관없다. 추운 물속이 아니라 시원한 물속에서 둥둥 떠 있는 기분 좋은 느낌, 가볍고 자유롭게 몸을 움직여서 하는 서핑은 여름에만 가능하니까 그것으로 충분하다.
---「슈트 : 슈트와의 전쟁」 중에서
여전히 나는 직진 라이딩밖에 못하는 초보 서퍼지만, 언제나 내 마음속 첫 번째는 서핑이다.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출동을 기다리는 대원처럼 파도를 기다린다. 그렇지만 그 파도가 언제 올지 모르니까, 파도가 없을 때는 미리미리 할 수 있는 일을 집중해서 끝내 놓아야 한다.
한편으로는 서핑 덕분에 유연하지만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다고 느낀다. 예전의 내가 모든 파도를 이겨 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은 내게 맞지 않는 파도는 흘려보낼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달까. 나에게 맞는 파도를 알고 기다리는 겸손한 자세, 언제 올지 모르는 파도처럼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유연한 사고와 균형 감각,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모두 서핑을 하며 자연스럽게 배운 것들이다.
---「직진 라이딩 : 초보 운전의 그것」 중에서
세트가 아닌 애매한 파도를 타다 보면 이내 현타가 오곤 했는데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 번째는 파도를 잡겠다고 허우적대다가 어느새 맹렬한 기세로 덮쳐 오는 세트에 휘말려 통돌이를 당하는 경우다. 작은 파도를 잡으려면 라인업을 (해변 쪽으로) 당겨야 해서 큰 파도가 왔을 때 와이프 아웃 되기 일쑤였다. 두 번째는 운 좋게 파도 잡기에 성공했어도 뒤를 돌아보면 더 질이 좋은 세트가 들어오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좀만 더 기다릴걸…’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였다.
세트를 타야 한다는 말은 곧 파도를 기다릴 줄 아는 서퍼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보드 위에 서는 기술만이 서핑이 아니라 파도를 보고 기다릴 줄 아는 것까지가 서퍼의 능력인 셈이다. 세트를 기다릴 줄 모르고 사소한 파도에 힘을 다 빼던 내게는 아주 큰 깨달음이었다.
---「세트 : 인생에 악재가 세트처럼 몰려올 때」 중에서
파도가 고파서 단숨에 달려온 옆 동네 거제에서 12월의 첫 서핑을 시작했다. 영하 8도, 왕복 운전 네 시간, 슈트 입고 벗고 씻는 데 두 시간, 서핑을 한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반 정도? … 고생이란 고생은 사서 다 하고 파도는 타지도 못하면서 겨울 서핑을 왜 하는지 사실 나 자신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뭐랄까, 한번 해 보면 이게 또 나름의 거친 매력이 있다. 차디찬 바닷물에 온몸이 던져졌다가 보드 위로 올라오면 매번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 든다. 한계를 시험하면서 조금 더 강해진 것 같은 기분, 진정한 서퍼에 한 발 더 다가선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여름을 기다리는 마음이 금방 지치게 되니까, 일종의 혹한기 훈련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임하고 있다. 그렇게 담금질하다 보면 이듬해 봄도 금방 올 테고.
---「겨울 서핑 : 담금질의 계절」 중에서
사이드 라이딩을 하고 나면 기분이 째져서인지 혹은 실제로 파도를 가르며 타기 때문인지, 서퍼들은 ‘사이드 라이딩을 한다’보다 ‘사이드 짼다’라는 은어적 표현을 더 많이 쓴다. 좋아하는 일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때로는 옆길로 샐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앞만 보고 직진하기보다 돌아갈 줄도 아는 여유를 가져 보는 것. 그게 때로는 더 어렵지만 폼 나는 길이라는 것. 전부 사이드 라이딩을 하며 배웠다고 하면 너무 낯간지러울까? 모처럼 사이드가 잘 째져서 기분도 째지는, 한 서퍼의 시적 허용이라고 생각해 주면 좋겠다.
---「사이드 라이딩 : 좋아하는 것을 더 오래 하기 위한 방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