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대는 탈진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하는 사회적 분위기, 중독성 강한 정보통신 기술, 신자유주의 자본주의가 부과하는 끝없는 심리적?사회적 압박은 우리를 탈진 상태에 이를 때까지 일하도록 몰아붙인다. 최근 몇 년간 직장에서 우울증, 만성 스트레스, 번아웃을 겪는 사례가 전례 없이 증가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재택근무로 전환됐을 때도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마치 일이 삶의 모든 부분을 장악한 것 같다. 게다가 우리는 삶의 모든 측면을 일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 인생의 동반자, 친구, 자녀와의 관계를 비롯해 건강과 체력 유지, 자기 계발과 개인적 성장에 이르기까지 인생에서 점점 더 많은 영역을 수고로운 노동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만연하다. 우리는 이 모든 영역에서 열심히 ‘노력work on’해서 뛰어난 성과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단어 선택은 일이 인간의 사고에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p.17~18
우리는 직장 생활에서 끊임없이 도덕적 상해moral injury(개인의 도덕적?윤리적 신념이나 가치와 충돌하는 경험에서 발생하는 심리적?정신적 고통이나 트라우마-옮긴이)를 입지만, 재정적인 이유로 직장을 그만둘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회복탄력성을 길러라’, ‘깊이 심호흡해라’, ‘일과 삶의 경계를 명확히 설정해라’ 따위의 조언도 신물이 난다. 그렇다면 탈진 상태에 이르게 한 외부적인 원인을 바꾸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인이자 흑인이자 레즈비언이었던 오드리 로드는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받아들인 것은 이제 더 이상 나를 축소시킬 수 없다”라고 했다. 급진적 수용, 즉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패배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에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현명한 결정이다.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에 불필요하게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 p.32~33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번아웃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진단명이기도 하다. 마치 19세기 번아웃의 전신으로 유행병처럼 번졌던 멜랑콜리아나 신경 쇠약증처럼 말이다. 멜랑콜리아는 창의성, 학문적 소양, 천재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신경 쇠약증은 높은 지능, 감수성, 예술적 기질과 연결되어 있었다. 번아웃도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이들과 유사한 맥락에서 일종의 영웅적 훈장이라고 볼 수 있다. 번아웃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자신의 모든 것, 혹은 그 이상을 바쳐 일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을 불태워 일했다는 뜻이다.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채찍질하며 맡은 바 임무를 양심에 한 점 거리낌 없이 충실히 수행했다는 뜻이다. 번아웃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성실한 사람이다. 책임감이 지나쳐 감당할 수 있는 일보다 더 많은 일을 맡아 해내고야 마는 사람이다. 언제나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사람이다. 게으름을 모르는 사람이다. 패배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 p.45~46
도널드 트럼프는 다른 사람을 패배자라고 부르는 데 거침이 없다. 트럼프가 쓴 책을 보면 패배자야말로 가장 최악의 인간상이다. 트럼프는 타인에게 무관심한 사람, 거짓말쟁이, 비도덕적인 사람, 심지어 범죄자보다도 패배자가 더 최악이라고 말한다. 트럼프의 정의에 따르면 패배자는 돈이나 권력을 잃은 사람 혹은 돈이나 권력을 극대화할 기회를 탕진하는 사람이다. 가장 강하고 똑똑한 사람, 더 정확하게는 가장 무자비한 사람만이 성공하는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을 능력이 없는 나약한 인간이다. 문제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트럼프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패배자’를 악인으로 간주하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 이러한 문화적 태도의 이면에는 부와 권력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고, 그로 인해 무력하고 의존적인 처지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시대를 초월한 뿌리 깊은 불안감이 자리 잡고 있다.
--- p.81
소설 속 화자는 바틀비를 ‘움직임이 없다’, ‘온화하다’, ‘시체 같다’ 같은 단어로 묘사하며, 유령 같은 창백함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바틀비는 어떠한 욕구도 없는 산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대답할 때를 제외하고는 결코 먼저 말하는 법이 없다. 오늘날로 치면 바틀비는 아마도 번아웃이나, 삶의 경험에서 그 어떤 즐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무쾌감증을 앓고 있다고 묘사될 것이다. 세상과 단절되고 소외된 채 바틀비는 아무것에도 관여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누구의 도움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화자인 변호사가 다른 일을 제안하자 바틀비는 자신이 까다롭지 않다고 주장하면서도 모조리 거절한다. 입에 맞는 음식만 있으면 기꺼이 먹겠다고 주장하면서도 끝끝내 굶어 죽고 마는 카프카의 단편 소설 「굶주린 예술가A Hunger Artist」(1924)의 주인공과도 닮았다.
--- p.95
내면의 비평가가 활동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 생각은 그저 단어일 뿐이고 믿음은 사실이 아니라 그저 믿음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시답잖은 소음일 뿐이다. ‘나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며 친구도 없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내면의 비평가가 ‘너는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며 친구도 없어’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내면의 비평가가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들로 자신을 폭격할 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고 다짐해 보라. ‘내 안의 비평가가 또 더러운 입을 놀리고 있네’라고 소리 내어 말해 보라.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 ‘내가 …라고 생각하고 있네’라는 객관화만으로도 내면의 비평가가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크게 축소할 수 있다. 해리스는 인간의 마음을 회전 초밥집에서 초밥 접시를 실어 나르는 컨베이어 벨트에 비유한다. 여러 가지 초밥이 우리 앞을 끊임없이 스쳐 지나간다. 그중에 먹고 싶은 것만 집어서 먹으면 된다. 먹고 싶지 않은 것은 그대로 지나가게 두면 된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에 일일이 주의를 기울일 필요도 없고, 그런 생각으로 괜히 식사 시간을 망칠 필요도 없다
--- p.122~123
독일 출신의 세계적인 영성가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그의 저서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The Power of Now: A Guide to Spiritual Enlightenment』(1997)에서 지금 이 순간이 현재에도 미래에도 우리가 가진 전부이기에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재를 소중히 여길 줄 모른다. 우리의 생각과 감정은 대부분 과거나 미래를 맴돈다. 기억과 기대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과거는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며, 원인과 결과라는 서사를 제공한다. 반면에 ‘미래는 어떤 형태로든 구원과 성취를 약속한다.’ 그러나 둘 다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가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것은 현재뿐이다. 현재는 가장 소중한 것일 뿐만 아니라 존재하는 유일한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현재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국 살아서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 p.166
완벽주의가 언제 어디서 유래했는지 그 기원을 탐구하다 보면,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완벽주의자는 기준이 높은 부모 밑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있는 그대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게 만드는 부모나 원하는 성취를 이루어냈을 때만 조건부로 애정을 주는 부모 밑에서 자랐을 수도 있다. 여기에 어린 시절 들었던 지나치게 비판적인 말을 내면화하는 경향까지 더해지면, 어른이 되었을 때 신체적인 건강과 정서적인 안녕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러나 완벽주의는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없다.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가 초래한 결과이기도 하다. 완벽주의는 경쟁을 기본 원칙으로 삼는 사회가 낳은 결과물이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가장 완벽하고 가장 기능적인 사람이 승리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이 문화는 결점이 없고 매끄럽고 완벽한 존재를 소중히 여기도록 장려하는 반면에 모든 종류의 불완전함, 특히 노화와 약점과 기능 장애를 두려워하도록 부추긴다. 인공적인 미학을 추구하며, 결점이라고 생각되는 지점은 포토샵으로 보정해 버린다. 우리는 구부러지고 흠집이 난 것도 아름답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살아간다.
--- p.201~202
스토아학파는 운명을 한탄할 시간이 없다고 여기며, 피해자라는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원망ressentiment’할 대상을 찾는 이 시대의 문화는 스토아학파에게는 완전히 딴세상 이야기다. 누구나 불운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이 세상의 이치다. 이 진리를 빨리 받아들일수록 좋다. 스토아학파는 삶은 당연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오늘날 서구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기대하는 삶의 지평은 이와는 너무나도 다르다. 행복과 웰빙을 넘어서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삶을 꿈꾼다. 그런 삶이 당연하게 주어지지 않을 때 많은 사람들은 강한 불공평함을 느낀다.
--- p.244~245
석가모니는 “누군가에게 분노를 품는 일은 그 사람이 죽기를 바라면서 내가 독을 마시는 것과 같다”는 말을 남겼다. 나르시시스트도 뱀파이어만큼이나 자력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대체로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스스로가 위대한 존재라는 허울뿐인 환상에 갇혀 살아가기 때문에 진정한 자기 인식이 없고 따라서 발전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지속적이고 깊은 인간관계를 형성할 수 없으며 진정한 친밀감을 느낄 수도 없다. 한마디로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성공하고 화려한 삶을 사는 듯해 보이지만 영원히 그들만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 p.284
21세기의 일에는 특별한 슬픔이 깃들어 있다. 일은 일 중독자들만의 마약이 아니라 대중의 새로운 아편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노동에서 소외되는 이유를 두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 우리는 생산의 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노동을 할수록 그 이익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 둘째, 점점 더 복잡해지는 분업화로 인해 노동자는 더 이상 노동의 결과물을 볼 수 없다. … 마르크스가 젊은 시절에는 노동을 통한 해방을 꿈꾸었지만 노년기에는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을 꿈꾸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나이 든 마르크스가 젊은 마르크스보다 현명했음이 분명하다.
--- p.296~297
우리는 집단적 마비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끼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듯하다. 눈앞에서 현재의 세계가 종말을 맞이하고 있지만 아직 새로운 세계는 보이지 않는다. 철학자 재커리 스타인Zachary Stein은 우리 시대를 ‘세계와 세계 사이의 시간’, 즉 ‘한 세계가 종말을 맞이하는 동시에 다른 세계가 탄생하기를 기다리는’ 전환기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파생되는 불확실성은 수많은 걱정을 낳고 있다. 이 또한 우리를 여러모로 지치게 하는 원인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변화나 불확실성을 좋아하지 않는다. 둘 다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시인 존 키츠Joan Keats는 사람들에게 ‘부정적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말했다. 부정적 능력이란, ‘불확실성과 미스터리와 의심을 묵묵히 견디며 사실과 이성을 좇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자신의 미래뿐만 아니라 자녀와 손주들의 미래를 계획하고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큰 고통을 줄 수 있으며,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감당해야 하는 가장 큰 부담 중 하나일 것이다.
--- p.32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