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인연은 얼마나 새로운지 모른다. 며칠 전 실습생으로 파견되어 온 졸업반 학생은 어릴 적에 나의 단골 환자였다고 고백한다. 병치레가 잦아서 어머니 등에 업혀서 병원 문을 드나들었다니. 자라면서 자주 찾아와서 이름 석 자를 기억하고 있었다고 한다. 오래전, 그때 어떤 인연의 끈이 작동하였던가 보다. 실습할 장소를 찾다가 보니 나의 이름이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와 망설임 없이 실습 장소로 정하였다니. 실습을 마치고 직장을 구할 즈음이면 이곳에서 꼭 일하고 싶다고 말하며 볼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그가 나의 소중한 인연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 p.39 「인연 복」 중에서
앞으로 꿈을 안고 나아갈 33년의 새로운 인생을 위해서 책을 묶었다. 『복사꽃 오얏꽃 비록 아름다워도』. 개원 준비에 바빠 미루다 베풀어준 정성에 보답하는 의미로 한 분씩 선사하려고 마음먹었다. 그 첫 시작으로, 문득 생각나서 들렀다는 고등학생 아이에게 한 권을 건넸다. 제목을 뚫어지게 보고 있기에, 감동으로 그런가? 슬쩍 물어보았다. 복사꽃이 무슨 뜻일까? 그가 씩씩하게 답한다. “복사한 꽃, ‘Printed Flower’, 아닌가여?” 유창한 발음으로 아무런 의심도 없는 표정을 지으며 씩씩하게 대답하는 그 녀석에게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그냥 웃지요. 그냥 가만히 웃어줄 수밖에. 무엇을 상상하든 때로는 그 이상인 경우도 많을 테니까.
--- p.55 「무엇을 상상하든」 중에서
성장기에는 3~6개월에 한 번이라도 아이의 키와 체중을 재고 정기적으로 신체 검진을 해보는 것이 성조숙증으로 인해 평생 마음의 짐을 남기지 않는 비결이다. 성조숙증 발견이 늦을수록 치료 효과는 떨어진다. 그에 반해 조기 발견하여 치료하면 여러 가지 손실이 그만큼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방치하다가 자칫하면 아이의 키가 작게 될 뿐 아니라 마음마저 다칠 수 있으니 유념할 일이다.
COPQ(Cost of Poor Quality)는 수준 이하의 질로 인해 발생하는 의료 질 실패비용이다. 실수, 태만, 헛된 노력, 부적합한 체계, 미숙함 등을 해결하면 30%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흉부 Xray 촬영 시 “숨 참으시고~!” 하지 않아 영상이 잘못 나오면 재촬영해야 한다. 불필요한 비용이다.
코로나 시대, 삶의 질에 조금 더 집중하면 좋지 않으랴. 의심되면 바로 검사하고, 최선을 다하고, 그때그때 확인해 보는 것이 COPQ를 막는 지름길이리라.
--- p.81 「코로나 시대의 COPQ」 중에서
혈관을 찾으려고 손을 잡자, 병원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른다. “사람 살리오~!” “아이고~ 사람을 쥑이네~” “살려주소~!” 괜찮다고, 그리 아프지 않다고 달래고 얼러도 눈을 바라보면서도 고래고래 질러대기를 반복한다. 사람들이 다 듣도록 알리는 목적이라는 것이 아이 어머니의 설명이다. 30분 단위로 막히지 않도록 해둔 장치에서 혈액을 뽑으면 아프지도 않은데, 눈물도 흘리지 않으면서 목청껏 소리만 질러댄다. ‘사람 살리오~’가 나오니 대기하던 환자들도 처음엔 겁먹은 표정이다가 아이의 반복되는 멘트를 듣고, 울다가 웃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혈관에서 혈액을 뽑는 일이 다 끝난 아이가 헤헤 경기장을 나서듯 웃는 표정으로 사탕을 입에 물고 주사실 문을 나오니 생중계를 듣던 이들이 그제야 박장대소한다. 귀엽기도 하고 측은하기도 한 얼굴에는 장난기까지 어려 있다.
--- p.101 「살리오~!」 중에서
의과대학 시절, 독일어책에서 배운 구절이 떠오른다. 공부할 과목도 많고 외울 분야도 많아서 어떤 시험을 어찌 치렀는지 정신없이 보냈지만, 그 시간에 배운 한 문장이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구두로 묻고 답하는 시험을 보는 장면이었다. 한 학생이 환자에 대한 처방을 내리는 설정이었다. 모르핀처럼 통증에 아주 잘 듣는 약의 용량을 적어내는 것이었다. 자신이 공부했던 분야였고 약 이름까지 맞출 수 있다고 생각한 그 학생이 자신만만하게 답을 적어서 내고 나갔다. 문밖에 나가자마자 퍼뜩 생각났다. 소수점 자리를 잘못 찍은 것이었다. 10배나 많게 투여하게 된 것이었다. 얼른 문을 연 학생이 다시 들어와 실수했다고, 점 하나를 잘못 찍었다고 하자 노교수는 고개도 들지 않고 답한다. “이미 죽었네.”
오래전, 의과대학에서는 의사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답안지는 고치면 안 된다고, 틀린 답으로 처리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답을 적어내는 순간 의사의 판단으로 사람의 몸에 약이나 처방이 투여되는 것이니 돌이킬 수 없지 않은가. 그만큼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학생 때부터 몸에 익혀야 한다는 뜻이리라.
--- p.140 「낮에는 해처럼, 밤에는 달처럼」 중에서
일전에 모임이 있어 인근 공원을 지나다가 한 무리의 낯익은 얼굴을 만났다. 자세히 보니 내가 치료하는 아이들과 그의 부모들이었다. 반가워 달려오는 아이들과 어머니들, 그 조합이 궁금하여 물으니 “우리는 친구예요.”라며 합창한다. 신체가 빨리 성숙하여 검사받으러 온 아이들이다. 치료차 온 병원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얼굴이 익게 되고, 또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공감대가 형성되어 계모임으로 발전하였다고 했다. 짧게는 1, 2년, 길게는 3, 4년 되고, 일정한 간격으로 진료해야 하니 누구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으리라. 또래 아이들의 증상과 어머니들의 궁금증도 엇비슷할 터이다. 그러니 환상적인 조합 아니겠는가.
그들 중에는 치료를 끝내고 이제는 자연스레 커가는지 점검만 하는 이도 있지만, 그 모임에 빠지지 않고 선배로서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는 이도 있다.
--- p.165 「공들이는 하루가 되기를」 중에서
추석 당일 당번 근무를 하였다. 오후 2시부터 6시까지라니 아침 일찍 서두르면 가능하겠다고 여겼다. 얼른 집안 명절일을 끝내고 병원으로 나갔다. 12시가 지나자 아픈 이들이 밀어닥쳤다. 전화기도 울어대기 시작한다. 북새통이 예견되었다. 진료실 문을 열어 진찰에 들어갔다. 쉴 새 없이 아픈 아이들이 밀려온다. 진료 대기 창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어찌 그리도 아픈 아이들이 많은지, 각각의 사연은 다르지만 나름대로 모두 긴박한 경우들이다. (중략)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화내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상대를 편하게 해주려 노력하던 이웃과 병원 식구들이 고맙다. 서로 배려하는 마음이 넉넉하였기에 두세 시간씩 기다린 끝에 진료받아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씩이나 잊지 않고 하면서 뒤돌아가는 선량한 이들에게 도리어 감사 인사를 꼭 드리고 싶다. 남에 대한 배려심이 곧 나의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겠는가.
멀리 영천에서 아이가 아파 119에 전화하여 문 연 병원을 찾아서 왔다는 아이 아빠는 오늘 밤 안으로 진료해 주기만 해도 감사하다며 느긋한 자세로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얼마나 신실한 대장부의 자세인가. 아픈 아이의 머리를 짚어가며 타들어 가는 속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하는 배려, 그분에게는 존경심마저 일었다.
--- p.197 「추석이 지나고」 중에서
독서 마라톤은 읽으면 읽을수록, 달리면 달릴수록 힘은 펄펄 남아돌고 머리는 맑아지며 가슴은 뿌듯해 왔다. 마지막 완주를 하는 날엔 종일 몰아서 달리는데도 피곤은커녕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하여 받은 완주 금메달, 처음부터 하프 코스를 신청하였으니 21,097쪽 이상은 읽어야 하였다. 다 읽은 페이지를 합산해 보니 하프 코스를 훨씬 넘었다. 번쩍이는 동그랗고 묵직한 금색 메달에‘책 읽는 동네 즐거운 사회’라는 별을 새겨넣은 finisher’s medal, 완주 기념 메달이 멋있어 보이는지 진료받으러 오는 아이들은 신기한 듯 만져보곤 한다.
일전에 한 아이는 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선생님, 직접 딴 금메달이에요?” 표정이 하도 재미있어서 “그래~!”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이가 또 묻는다.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받았어요?” 그 모습이 하도 귀여워서 금메달을 문고리에서 벗겨내어 아이의 목에 걸어주면서 독서마라톤대회에 참가해 보라고 알려주었다.
--- p.22 「금메달이에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