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16세기 중후반부터, 특히 말엽부터 중국과 극동제국의 유교적 정치문화·국가제도와 공자철학이 차츰 유럽에 알려지면서 르네상스 정치신학과 정치철학도 백성의 자연적 자유·평등사상과 폭군방벌론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서양인들은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공맹철학과 극동 정치사상·문화·종교를 소개하기 시작했고, 30년전쟁(1618-1648)의 종전 이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공맹의 도덕·정치철학과 중국의 정치문화를 확산시켰다. 신·구교 간 종교전쟁이 1630년대에 종식된 영국에서는 공맹철학과 극동문화가 지식인들 사이에 더 일찍이 본격적으로 스며들어 개신교파간 전쟁(1642-1651), 즉 의회파 청교도와 왕당파 국교회파 간의 내전(청교도혁명)의 정치사상적 배경으로 자리잡았다. 크롬웰의 청교도공화국은 르네상스의 종결이자 바로크사상의 완성이었다.
청교도혁명(1·2차 영국내전), 크롬웰공화국(1651-1660), 왕정복고(1660) 등으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사이 영국과 서양 지식인들의 관심이 공맹철학과 극동문화에 쏠리게 되면서 17세기 말엽이 되자 자연발생적으로 바로 계몽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계몽주의운동은 철학·종교·문화·예술에서 정치·경제에 이르기까지 전면적·포괄적이었고, 1688-1689년 영국 명예혁명을 추동함으로써 유럽을 격동시켰다. 극동제국의 경제적 번영과 사회적·과학기술적 선진성에 대한 유럽인들의 뚜렷한 본격적 인지와 착잡한 반응심리는 17-18세기 초 영국인들의 여러 글로도 나타났다.
로버트 마클레이(Robert Markley)는 “신세계 식민화의 이야기들이 국민적 위대성, 보편군주국, 기독교적 승리주의에 대한 유럽중심주의적 믿음을 강화시켰다면, 중국과 일본, 그리고 (1716년 이전의) 무굴제국 인도에서의 경험은 이 모든 이데올로기적 구조물을 근본으로부터 흔들었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극동의 경제적 패권과 “중국중심 세계(sinocentric word) 안에서 유럽이 주변화되는 추이에 대한 불안감”과 각성은 세계무역 안에서 느껴지는 영국과 유럽의 후진성을 너무 일상적으로 상기시키는 모든 것에 의해 산출된 깊은 불안감들을 문예적 이야기 속에서 “들추면서도 동시에 감추는” 보정補整 전략을 출현시켰다. 번영과 풍요의 황금시대를 달성하려는 꿈의 장소”로서의 중국의 모습은 당시 독자들에게 ‘유럽중심주의적’ 문명관과 개인적·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일련의 심각한 도전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조나단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서의 “걸리버가 일본인들과 조우한 것은 (...) 1800년까지 남아시아와 극동의 제국들에 의해 지배된 세계 안에서의 영국 경제력의 한계, 민족적 정체성과 도덕성의 한계에 대한 심각한 불안감을 표현한 것”이었다.
--- p.161
베이컨의 인식론적 출발점은 공자의 ‘선학이후사先學而後思(경험을 우선하고 사유를 뒤로함)’의 원칙과 유사하게 “경험을 통하지 아니한 일체의 인식 시도를 거부하고 경험의 성과들을 참된 방식으로 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베이컨은 일단 인간적 지식의 ‘갱신(Renewal)’을 통해 “(오만하게) 인간 지성의 그 작은 방(cell) 안에서가 아니라 겸손하게 더 넓은 세계에서 지식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면서 그는 감각의 기만에도 불구하고 감각에 유일한 ‘자연 해석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한편, 감각의 오류 위험과 함께 감각의 교정능력을 다시 감각에 부여하고 무無경험적 작화의 연역법을 재제하고 경험적 귀납법의 채택을 강조한다.
--- p.211
감각을 통해 그대로 받아들인 “자연의 빛”을 베이컨은 “경험의 빛”이라 불렀다. 그러므로 ‘자연의 빛’으로서의 “경험의 빛”은 곧 인간의 혼미한 정신과 미지의 자연, 그리고 혼탁한 세상을 모두 다 밝히는 ‘계몽의 빛’이다. 이런 의미에서 발리냐노와 산데는 1590년, 그리고 그로부터 20여 년 뒤 퍼채스도 공자철학을 “자연의 빛을 지침으로 취하는(규정하는)” 철학으로 서양에 소개했었다. 빛의 광명은 자연(본성)에서 방사되는 빛의 광명이다. 공자철학을 저들이 ‘자연의 빛의 철학’으로 소개한 것은 서양인들이 제일 먼저 접한 『대학』과 『중용』에 ‘자연본성’을 뜻하는 ‘성性’자가 10여 차례 나오고, 빛의 광명을 뜻하는 ‘명明’자가 무려 30여 차례나 나오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공자의 이 본성의 빛, 자연의 빛이 서양에서 본래 제각기 빛으로 밝히는 것을 뜻하는 영어 Enlightenment(계몽주의 운동)와 빛(광명)을 뜻하는 Lumiere(계몽주의)의 그 ‘빛’(light, lumiere)을 점화한 것이다.
--- p.222
베이컨은 비판적 경험론의 연장선상에서 수천 년의 역사적 경험으로 확인되지 않는 기독교 신화 속의 원죄적 성악설性惡說을 부정하고 자기 양심의 체험적 자기공감과 주변사람들의 본성적 도덕감정과 행동에 대한 경험적 관찰에 입각해 획기적으로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다. 그가 대변한 이 성선설이 공맹의 직접적 영향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당시 쏟아져 들어온 공자·중국문헌 속에서 모종의 힌트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그가 17세기 초 서양 기독교 세계에서 원죄론적 성악설을 뛰어넘어 성선설을 주장한 것은 대단히 돌비적突飛的인 일이다.
그러나 이런 베이컨도 자연관에서는 기독교적 자연정복관을 뛰어넘지 못했다. 성경의 대지정복론에 따라 그는 발달된 과학기술로 인간위주로 자연을 정복하고 무제한적으로 뒤틀고 비틀어 이용하는 자연정복관을 대변한다. 그의 이 인간위주의 자연정복관은 실로 오늘날의 전지구적 자연파괴와 환경파탄을 전혀 예견하지 못한 ‘인간파시즘(Humanfaschismus)’이라 할 만하다. 베이컨은 인간의 선한 본성이 동식물과의 친교 속에서 형성되어 나왔다는 진화론적 사실을 전혀 알 수 없다. 그는 진화론에 대해 꿈도 꿀 수 없었던 시대에 살았기 때문이다.
--- p.264
이미 사망한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1683년 무신론으로 몰렸고, 옥스퍼드대학은 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도서관 앞 ‘코트 오브 스쿨’에서 보드리언도서관의 반역적 장서들을 대량으로 분서하면서 뷰캐넌·밀턴 등 10여 명의 저자들의 저작들과 함께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시민에 관하여(De Cive)』의 독서를 금지하고 1683년 7월 21일 오후에 이 책들을 분서했다. 그러나 옥스퍼드대학은 얼마 지나지 않아 『리바이어던』을 교과서로 지정하는 ‘세기의 변덕’을 부렸다. 상당히 세속화되고 물질지향적으로 변하는 17세기말의 영국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심이 크게 약화된 청년층을 향해 유교적(본성적)·민본주의적 자유·평등론과 폭군방벌론을 분쇄하고 절대군주정을 세속적 욕구지향의 논리로 일관되게 변호하는 데에는 『리바이어던』을 따를 만한 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홉스의 정치철학은 가톨릭의 동방선교와 유교적 정치사상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 p.309
컴벌랜드가 『자연법의 철학적 탐구』를 집필할 당시에는 16세기 중반 이래의 이베리아·이탈리아인들의 중국보고서들, 그리고 퍼채스의 『퍼채스, 그의 순례여행』(1613), 트리고의 『중국인들 사이에서의 기독교 포교』(1615), 세메도의 『중국제국기』(1643), 마르티니의 『중국기』(1659), 슈피첼의 『중국문헌 해설』(1660), 키르허의 『(삽화를 곁들인) 중국 해설』(1667), 니우호프의 『네덜란드연합주의 동인도회사로부터 북경 또는 중국황제에게 파견된 사절단』(1665)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인토르케타가 ‘대학·논어’를 번역한 『중국의 지혜』(1662)와 ‘중용’을 번역한 『중국인들의 정치·도덕학』(1667) 등 공자의 경전들까지도 이미 출판된 상황이었다. 또한 공자를 중국의 소크라테스로 찬양한 라 모트 르 베예의 『이교도들의 덕성에 관하여』(1642), 존 웹의 『중국제국의 언어가 원시언어일 개연성의 입증을 시도하는 역사적 논고』(1669), 나다나엘 빈센트의 궁정설교 ?영예의 바른 개념?(1674) 등 공자철학이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고 영국 국왕에게까지 공공연하게 강설講說되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컴벌랜드가 서양의 도덕철학 전통과 무관하게 갑자기 효·인간애·인애 등 도덕감정을 도덕의 기초로 들고 나와 홉스를 비판한 것은 공맹철학 확산의 일단으로 봐야 할 것이다.
--- p.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