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 나면 속이 후련해지면서 지금 겪는 힘겨움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은 위로가 되는 음식이 있다. 그런 것들은 몸을 채우기보다는 마음을 달래준다. 소울푸드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깊은 아픔이 배어 있다. 노예로 끌려와 강제 노동에 시달리던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고칼로리 음식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그들이 먹던 것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었을 것이다. 고된 하루 끝에 나누던 한 끼는 마음을 채우고, 때로는 영혼 깊은 곳을 흔드는 위로가 되지 않았을까. 내게도 떠올리면 가슴 먹먹한 음식이 몇 가지 있다. 불편한 식사 자리를 마친 후 집에서 먹던 고추장 팍팍 넣고 비빈 양푼이 비빔밥, 지독한 독감으로 힘들 때 엄마가 주던 복숭아 통조림, 자취생 시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시장에서 혼자 뜯던 족발, 약간의 한기를 느낄 때 마시는 뱅쇼 한 잔. 육신의 허기보다 영혼의 허전함을 달래주던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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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민얼굴이다. 태양을 향해 한껏 제 몸을 부풀리고서 있는 공원의 싱그러운 나무들은 감정을 숨기는 법이 없다. 햇살과 비와 바람을 뭉근하게 버무려 나이테를 채운 그들은 정직하다. 물오른 느티며, 미루나무, 수양버들은 아이들 웃음처럼 가식이 없다. 괭이밥, 패랭이, 꽃양귀비도 본연의 색 외에는 색조화장을 하지 않는다. 뽕나무 가지에 앉아 짝을 부르는 후투티의 목소리 또한 마찬가지다. 저들은 위선과 가식의 인간과 달리 모두 자신의 마음을, 표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말한 루소가 아니라도 봄날의 자연은 포커페이스를 걸치지 않는다. 가만히 나를 바닥으로 내려놓고 스스로를 돌아본다. 이제부터라도 겹겹이 둘러싼 높은 담장을 허물면, 가면을 내려놓고 본연을 드러내면 어떨까. 저 봄날의 버드나무나 꽃들처럼 거짓을 벗으면 민불처럼 해맑아지리라. 긴장과 위장으로 점철된 외면을 벗고 무장해제한 얼굴로 사람들을 만날 때, 나의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따뜻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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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오롯이 나의 작품이지만 종종거리며 역할에 열중해도 돌아오는 커튼콜은 없었다. 좋은 성과는 당연히 어머니나 남편, 아이들 노력의 결과였고 나쁜 결과는 내 탓이었다. 일상극의 무대는 연습이 없는, 언제나 본 공연이었다. 자칫 상대역과 합이 맞지 않으면 서로의 행동이나 대사가 어긋났다.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불화가 민낯을 드러냈고 동작선을 다시 짜야만 했다. 조명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배우는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우울에 함몰된 날들은 자존감마저 깎아내렸다. 먼지처럼 작아져 사라진다 하더라도 누구 하나 알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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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트라가 극에 미치는 영향이 미미한 것에 비해 앙상블은 직접적으로 개입한다. 비록 정해진 배역은 없지만 뮤지컬의 분위기와 주제 표현을 위해 주요 배역들 못지않게 중요하다. 여러 단역을 연기하거나 주역 배우와 함께 노래하는 코러스, 극의 스펙터클을 위한 무용수가 될 때도 있다. 주인공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작품을 끌어갈 때 무대 위의 장면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적재적소에서 필요한 부분을 담당한다. 눈앞에서 모든 광경이 실제로 진행되는 공연예술의 한계 속에서 관객의 몰입을 돕는 상징적인 장치 역할이 되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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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단순히 땅에 묘목을 심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의지이다. 양치기 노인이 심은 도토리가 자라 숲이 되면서 황무지는 살아났다. 물이 흐르기 시작하자 바람은 씨앗을 옮겨왔고, 사람이 모여들었다. 밭에는 채소가, 산기슭에는 보리와 호밀이 자랐다. 세찬 바람만 불던 폐허는 사람들의 밝은 웃음이 넘치는 곳으로 변모했다.
소설처럼 숲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인류를 위해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장소가 마땅치 않다거나 제대로 돌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우려 탓에 나무 심는 것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집 근처의 자투리땅에 텃밭을 가꾸거나 반려 식물을 집 안으로 들이는 것으로도 비슷한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전 생애에 걸쳐 사용하는 목재의 양은 46.8㎥이며, 이를 얻기 위해서는 425그루의 나무가 필요하다고 한다. 최소한 내가 사용한 만큼은 미래를 위해 심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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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하게도, 한때는 모든 것을 눈으로 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적이 있다. 이제는 보이지 않아도 스스로 드러나는 진실들이 있음을 안다. 그런 것은 종종 알아채지 못하도록 우리 주변에 조용히 존재하다가, 어느 순간 양각으로 도드라져 자신을 드러낸다. 오랜 시간 내적으로 성숙하여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친구처럼, 미로 같던 산길에서 만난 인식표처럼, 작은 일에도 공감해 주는 이웃처럼 말이다. 나보다 먼저 역경을 겪은 사람들이 뒤따를 이들을 위해 남긴 표식이다. 그렇기에 방황하는 여행자의 시선에 가장 가까운 곳에 이정표가 서 있다. 암흑에서 방향을 안내하는 가이드 러너, 길을 찾는 이들을 위한 북두칠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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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을 빼는 일엔 별로 익숙하지 않다. 육신은 물론 정신 또한 상황에 맞춰 힘 조절이 가능할 만큼 유연하지도 못하다. 안 그런 척 감추다 보니 더욱 경직되었고, 시간이 지나며 고착되었는지 모르겠다. 일부러 버겁게 계획을 세우고 지키기 위해 힘들도록 자신을 다그쳤다. 필요 이상으로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주변인들에게 나의 방식을 강요하기도 했다. 타인의 눈에 비치는 모습에 신경을 곤두세우다가 결국 나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지치도록 만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정작 힘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럴싸하게 힘을 주지도 못했다. 초점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카메라 렌즈처럼 늘 핀트가 약간씩 어긋났다. 적절한 조절이 필요한 시점에서 끈을 너무 강하게 잡아당겨 긴장의 줄이 끊어져 버리는 일이 많았다. 상황에 유연하게 반응하지 못해 갑자기 분위기 싸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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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개를 켜는데 발아래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진다. 열어둔 문틈으로 들어온 달수 씨가 침대에 자리를 잡았나 보다. 인기척에 반응하듯 나른하게 몸을 움직이며 옆구리를 파고든다. 손을 뻗어 쓰다듬으려 하자 휙 고개를 돌려 문밖으로 나가버린다. 평소엔 주변에 관심이 전혀 없는 척 굴다가 본인이 필요할 때만 대답하는 도도한 성격이다. 무심한 듯 구는 통에 관심이라도 한번 받으려면 애가 탄다. 밀당의 고수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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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창으로 향긋한 소리가 들린다. 카페 앞쪽에 보이는 작은 정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다. 키가 큰 독일가문비나무부터 느티나무, 벚나무, 산딸나무, 병꽃나무, 긴병쑥풀, 미나리아재비가 모두 재잘재잘 제 목소리를 낸다. 하나씩 보아도 아름다운 싱글 오리진들이지만, 바닥에 앉은 잔디까지 모두 어우러지니 더없는 조화를 이룬다. 내 삶은 예전에도 지금도 이후에도 싱글 오리진일 것이다. 아이의 삶은, 싱글 오리진 혹은 블렌디드, 어떤 모습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 생이 아름답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태어난 곳과 떠나온 곳, 그리고 앞으로 정착하게 될 장소가 어디든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인으로 자연스레 융화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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