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과 오십 사이. 인생의 중간쯤에 서서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잠시 자문해 봅니다. 마흔과 오십 사이는 단순한 중간 지점이 아니라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는 중요한 시점이기에 그렇습니다. 더 나은, 더 멋진 청출어람 인생을 위해 나를 돌아보고 단단하게 다듬어 나갈 때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일과 관계를 새롭게 정립해 흔들림 없는 삶의 기준을 확인해 보는 것입니다.
--- p.6, 「오래된 미래 《논어》로 찾는 삶의 기준」 중에서
습상원야(習相遠也), 반복이 점점 더 멀게 합니다. 반복이 인생을 성공적으로 만들고 꾸준함이 인생의 격차를 만드는 기반이 됩니다. 그런데 그 반복이 어렵습니다. 꾸준함이 쉽지 않습니다. 그게 쉬운 일이라면 2,500년 전부터 무슨 이유로 그렇게 강조했겠습니까? 오랫동안 하면 잘할 수 있고 어떤 일이든 잘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 원리를 몰라 못하는 게 아닙니다. 꾸준히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문제의 모범 답안을 공자께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을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子曰 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자왈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
--- p.27, 「호지자(好之者) | 좋아하는 자는 이기기 어렵다」 중에서
“세월 가는 게 이와 같구나.”
제자들은 스승의 이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어떤 일에 집중해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일해야 하는가? 살아가는 이유와 살아가는 방식과 살아 내는 이유와 살아 내야만 하는 목적을 느끼게 하는 묵직한 한 방이기 때문입니다.
--- p.34, 「불사주야(不舍晝夜) | 시간은 강물과 같아 쉼 없이 흘러간다」 중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하라.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부지인야
상사가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상사를 잘 모름을 걱정해야 비로소 문제의 실마리를 풀 수 있습니다. 팀원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팀원을 잘 모름을 걱정해야 비로소 문제가 풀립니다. 고객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고객을 잘 모름을 걱정해야 고객의 지갑이 열립니다. 아내가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아내를 잘 모름을 걱정해야 평화가 찾아옵니다. 아이가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아이를 잘 모름을 걱정해야 비로소 문제가 해결됩니다. 업무가 나에게 맞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업무에 관해 잘 모름을 걱정해야 비로소 일이 쉬워집니다.
--- p.69, 「불환무위(不患無位) |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를 걱정하라」 중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이에 걱정이 있다.
子曰 人無遠慮 必有近憂
자왈 인무원려 필유근우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가까이에 근심이 있다는 말은 멀리 생각하면 가까이에 있는 근심 걱정이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근심 걱정을 이겨 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근심 걱정이 있다면 조금 더 멀리 생각해야 합니다. 희망과 꿈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이 희망과 꿈과 목표가 지금 자신을 힘들게 하는 근심 걱정을 이겨 내는 힘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 p.103, 「인무원려(人無遠慮) | 멀리 볼수록 쉬워진다」 중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비유컨대 산을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이루지 못하고 멈추었다면 이는 내가 멈춘 것이며 비유컨대 땅을 평평하게 만드는데 한 삼태기의 흙을 부어 진전했다면 이도 내가 나아간 것이다.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 進吾往也
자왈 비여위산 미성일궤 지 오지야 비여평지 수복일궤 진오왕야
시작하지 않으면 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하지만 시작하면 될 가능성은 1부터 시작합니다. 1이 2가 되고 2가 4가 될 수도 있기에 중요한 건 바로 시작입니다. 혼자 못하면 가족이 함께할 수도 있습니다. 내 대에서 못 이루면 아들이나 손자 대에서 이룰 수도 있습니다. 내가 못 이루면 마을이나 단체에서 이룰 수도 있습니다. 마을이나 단체에서 못 이루면 나라에서 이룰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께서 그 무모한 시작을 무모한 시작이 아니라 말한 것입니다.
--- p.145, 「수복일궤(雖覆一?) | 시작하는 사람도 마치는 사람도 모두 자신이다」 중에서
우리의 삶에 중요하지 않은 시기는 없지만 40대는 인생의 중추입니다. 마흔이 흔들리면 인생이 흔들리고 가정이 흔들리며 기업이 흔들리고 국가가 흔들립니다. 그래서 그런지 《논어》에는 ‘마흔’이라는 숫자가 세 번씩이나 등장합니다.
먼저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입니다.
마흔에 흔들리면 인생이 꼬입니다. 승진에 흔들리면 일에만 몰두하게 되고 연봉에 흔들리면 이직과 전직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성에 흔들리면 그간 쌓아 올린 인생 탑이 공염불이 될지도 모르며 한눈을 팔면 나머지 눈도 빼앗길지도 모릅니다.
두 번째 언급은 사십이 견오언(四十而 見惡焉)입니다.
나이 마흔에 미움을 보인다면 인생이 이미 끝이라는 공자의 지적입니다.
세 번째 언급은 사십오십이무문언(四十五十而無聞焉)입니다.
나이 마흔, 쉰에도 잘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크게 두려워 할 사람은 아니라는 공자의 경고입니다.
마흔 고개를 잘 넘기는 것이 성공적 인생의 첩경임을 공자는 《논어》에서 반복적으로 언급했습니다.
--- p.153, 「사십오십(四十五十) | 인생의 중추에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능력」 중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상급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다음이고 곤경에 처해서 배우는 사람은 또 그다음이며 곤경에 처해도 배우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 하급이 된다.
孔子曰 生而知之者上也 學而知之者次也 困而學之又其次也 困而不學民斯爲下矣
공자왈 생이지지자상야 학이지지자차야 곤이학지우기차야 곤이불학민사위하의
10, 20, 30, 40대의 바쁜 40년을 보낸 후 더 안정되고 희망적인 50, 60, 70, 80대의 40년을 맞이하기 위해 인생의 중심 마흔과 오십 사이에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과 일을 세우는 힘의 근력을 키우는 일입니다.
10, 20, 30대가 만족스럽지 못했다면 이제 困而學(곤이학)을 생각할 때입니다. 그간의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여야 할 때입니다. 자신의 태도나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거나 믿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마흔과 오십 사이는 곤이학 하기에 가장 좋은 때입니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자신을 세우고 일을 만들어 냈습니다. 과거 누군가 그런 의미 있는 마흔과 오십 사이를 보냈다면 그건 지금의 우리에게도 가능한 일입니다.
--- p.178, 「곤이불학(困而不學) | 곤경에 처해서도 배우지 못하면 구할 길이 없다」 중에서
맹무백이 효에 관해 물었을 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는 오로지 자식이 아프지 않을까만을 걱정한다.
孟武伯問孝 子曰 父母唯其疾之憂
맹무백문효 자왈 부모유기질지우
공자께 이 질문을 한 제자는 당시 노나라 이름난 가문 중의 하나인 맹 씨 가문의 젊은이 맹무백이었습니다. 맹무백은 당시 세도가의 자손으로 몸이 매우 뚱뚱했습니다. 체(?)가 그의 원래 이름이었습니다. 이는 ‘돼지’라는 뜻으로 그가 매우 뚱뚱했음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그가 공자께 효를 물었을 때 공자는 바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네 부모는 오로지 네가 병들지 않을까만을 걱정할 것이다. 네 부모는 혹여 네가 병으로 고생이나 하지 않을까를 늘 근심하신다. 그러니 몸 관리를 잘해야 한다. 몸이라도 아프게 된다면 네 부모는 그것보다 가슴 아픈 일이 없기 때문이야. 그게 효지 뭐가 효겠느냐?”
--- p.191, 「기질지우(其疾之憂) | 내리사랑은 쉬워도 치사랑은 어렵다」 중에서
자공이 물었다.
바르게 사는 사람으로서 평생 가져야 할 한마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라는 말이다. 내가 하고 싶지 않은 바를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않는 것이다.
子貢問曰 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 其恕乎 己所不欲勿施於人
자공문왈 유일언이가이종신행지자호 자왈 기서호 기소불욕물시어인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에게 평생 필요한 한 글자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글자인지를 물었습니다. 제자인 자공이 단도직입적으로 딱 한 글자만 알려 달라고 했을 때 공자의 대답은 바로 ‘서(恕)’였습니다.
서는 용서(容恕)라는 말입니다. 용서는 恕를 容, ‘받아들인다, 담는다’는 의미입니다. 恕는 如(같을 여)와 心(마음 심)이 더해진 글자로 ‘같은 마음’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과 나의 마음이 같아지는 것입니다. 서로의 마음이 같아지려면 서로 상대의 입장에 서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용서
받는 사람의 입장이, 용서받는 사람은 용서하는 사람의 입장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 p.226, 「서(恕) |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다」 중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한다. 지자는 동적이고 인자는 정적이다. 지자는 즐겁게 살고 인자는 오래 산다.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知者動 仁者靜 知者樂仁者壽
자왈 지자요수 인자요산 지자동 인자정 지자락 인자수
인생도 이와 비슷합니다. 인생 전반은 지자의 삶이 더 어울립니다. 우리의 삶이 누구나 다 한 번뿐이기에, 불안정하고 흔들리기에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인생의 전반전은 일을 중심으로 더 활동적으로 더 도전적으로 더 열정적으로 힘찬 강물처럼 살아 본다면 후회가 적을 것입니다.
인생 후반은 인자의 삶이 더 어울립니다. 격한 인생의 전반과는 다른 더 편안하고 더 안정적이며 더 사랑스러운 삶을 살아 보기 위해서라도 그렇습니다. 더 용서하고 더 사랑하고 더 이해하는 삶이 바로 인자의 삶이기에 그렇습니다.
--- p.265, 「요산요수(樂山樂水) | 인생을 잡아 주는 두 개의 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