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 부작용으로 입원을 경험했지만 부스터 샷을 신청했고, 밀접 접촉자로 격리되어 회복된 후에도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다.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온몸을 덮은 땀띠를 두꺼운 방호복 속에 감춘 채, 벼랑 끝에 깊게 뿌리내린 한 그루 나무처럼 굳건히 버텨냈다. 누군가에게 희망의 열매를 건네줄 수 있기에, 또 ‘벼랑 끝에 서서 모든 걸 포기하고 주저앉았을 때조차도 누군가는 손을 내밀어 세상 쪽으로 한 발자국 끌어주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진실 하나를 믿기 때문에. 어둠과 고통의 이 시간도 언젠간 지나가겠지. 아니, 살면서 다시 벼랑 끝에 설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발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때마다 오늘을, 기쁨에 울던 아기 엄마의 눈물을, 또 어느 벼랑 끝에 서 있을지 모를 나무 한 그루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일어나 힘껏 손을 내밀 것이다. 포기하고 주저앉아 일어설 힘조차 없는, 벼랑 끝에 선 모든 내 환자들에게.
--- pp.54~55
“끼잉―” 갓 태어난 포유동물 같은 소리가 들렸다. 산모가 이걸 들었을까. 괜히 들어서 그녀의 가슴이 무너지는 건 아닐까 싶어 순간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반응을 살짝 살폈으나 알 수 없었다. 태아는 이후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금 전 울음소리가 세상에 나온 태아의 첫인사이자 유언이었다. 이름 없는 존재로 몇 초뿐이긴 했지만, 그것도 ‘인생’이었음을 말하는. 난 태아를 포로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 위로 손을 올려 잠시 토닥토닥하며 마음속으로 유언에 답했다. ‘고생 많았는데 미안…해……. 잘 자렴, 아가…….’ 그날 밤, 일정을 마치고 병원을 나가는 길에 산모의 남편과 마주쳤다. 걸어오던 그의 표정이 허망한 듯 씁쓸해 보였다고 생각하는 건 단지 내 기분의 투사일 뿐일까. 그는 나를 보고는 응급실에서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지 멋쩍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인사하였다. 나도 “고생많으셨습니다”라고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어디 가시는 길인지 여쭤보았다. 그는 장례식장이라고 했다. ‘아, 그렇구나’ 하고 보니 그의 옆에 서 있는 병원 직원이 눈에 들어왔다. 직원은 보자기에 싸인 작은 상자 하나를 양손으로 들고 있었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았으나 무게는 분명 430g일 것이다. 생도 신고하지 못했는데 죽음을 신고한다는 건 시작이 없는 끝처럼 무언가 결여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차트에도 기록되지 않는 태아의 인생은 어디에 보관해야 알맞은 것일까. 적어도 그와 나의 인연만큼은 덜어내어 가슴속에 담아 두기로 했다.
--- pp. 90~91
환자들에게 명확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의사여야 하지만 정작 회색, 그 모호한 경계에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 그 경계에서 나의 판단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다. 그렇게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놓치기도 한다. 이 회색의 공간은 내가 의사라는 업을 놓을 때까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회색의 공간을 극복하기 위해 수많은 의료진이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사실은 절대적인 답은 없다는 것이다. 한낱 인간인 의사가 내린 판단이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안에서 나의 판단이 더 맞기를 바라고, 더 옳고 바른 방향이기를 바라며, 환자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길이기를 바란다. 그런 간절한 바람을 갖고 환자를 진료하고 수술하며 동고동락하는 것이다. 언젠가는 명확한 경계가 뚜렷하게 보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서 말이다. 회색, 그 모호한 경계를 두드리며 오늘도 나는 환자를 기다린다.
--- pp.131~132
환자는 때론 조용히 숨을 거두지만 두경부외과의 환자들은 어느 날 갑자기 피를 토하고, 어느 날은 고통스럽게 호흡을 갈망하며 그렇게 떠나간다. 그때는 전공의로서 너무나 무력하다. 이 죽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몇 달간 천천히 다가오는 검은 안개 같은 죽음의 먹구름을 함께 바라본다. 뒷걸음쳐보지만 도망갈 수가 없다. 죽음은 때론 이슬비처럼, 때론 폭풍우처럼 다가온다. 환자는 속절없이 죽음에 젖어 드는데, 이때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비를 멈추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의 빗방울을 조금 덜 맞도록 우산을 씌워주는 일뿐이다. 사실 그 어떤 죽음도 절대로 무뎌지지 않는다. 그저 경험이 축적되며,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할 뿐이다. CPR에 달려가서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기도 한다. 그 농담은 정말로 재미있는 농담이어서가 아니라, 그 죽음의 무거운 공기 속에서 그저 있는 힘껏 숨을 내뱉어 보는 것이다.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남기 위해 죽음의 한가운데서 죽음의 눈빛을 잠시 피해 딴청 하는 것이다. 그 죽음은 때론 나를 힐난하듯 바라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막을 힘이 없다. 그저 환자가 폭풍우가 아닌 잔잔한 이슬비 같은 죽음으로 떠나갈 수 있도록 그 비바람 앞에서 등 돌려 환자의 죽음을 대신 맞아준다. 나는 죽지 않으니까.
--- p.223
나는 본능적으로 환자에게 다가간다. 나의 환자들은 훌륭한 스승님의 가르침보다도, 무서운 선배의 위협적인 지시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자연스럽게 나를 이끈다. 그들의 감정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이 겪은 일들의 의미를 찾아나가는 여정을 함께하다 보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친밀해진다. 함께 울고 웃는 순간들은 점점 늘어가고 깊은 감정을 나누다 보면, 친밀함이라는 건 자연스럽게 자라나니까. 환자마다 친밀해지는 속도도, 친밀함을 표현하는 형태도 다르지만, 그것은 결국 믿음이 자라나고 있음을 뜻하기에 나는 그런 변화를 감지할 때마다 안도한다. 환자들이 나와 함께해주었던 순간들이 그랬듯이, 치료자와 나누는 친밀함이 해독제로 작용하여 그들을 방어적인 상태에서 벗어나게 도와줄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나듯 믿음이 자라나면 그들은 더 이상 나를, 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개인일 때 취약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면 든든하고 의지가 되며 편안해진다. 환자들이 과거에 혼자라고 느꼈던 나를 돌봐주었듯이 이제는 내가 그들을 돌봐줄 것이다.
--- pp.284~2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