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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 100년성장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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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 100년성장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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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4년 10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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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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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_궁중 비방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까지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궁중 비방에다 양약의 편리함과 이점을 더해 만든 활명수는 전래의 한약처럼 달여 먹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과 신속한 효력이라는 소비자 지향적인 특성으로 나오자마자 히트 제품이 되었다.

일석다조를 노린 활명수의 초기 고가 전략
활명수는 초기 고가 전략으로 시장 진입에 성공한 사례다. 1910년 2월 4일자 〈대한민보 (大韓民報)〉에 게재된 동화약방의 정가록 광고에 따르면 활명수의 가격은 40전이라고 기록돼 있다. 당시의 40전을 쌀 가격과 비교해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해보면 대략 1만 7,900원에 달한다. 동화약품 내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도 활명수 발매 때 가격이 당시 설렁탕 두 그릇 값이었다고 한다. 2009년 7월 현재의 가스활명수-큐 가격 600원에 비하면 엄청난 고가가 아닐 수 없다. 활명수는 발매 초기 궁중 비방이라는 신비한 이미지와 이러한 고가 전략을 통해 신뢰할 수 있는 고급 제품으로 소비자에게 다가갔음을 짐작할 수 있다. ---p.35

시대를 앞서 가는 활명수의 다양한 촉진 전략
우리나라 최초의 의약품 광고는 1896년 11월 7일자 〈독립신문〉에 게재된 고살기상회의 금계랍 (金鷄蠟) 광고다.
동화가 광고를 시작한 것은 이보다 조금 늦은 1910년으로, 동화는 그해 〈대한민보〉에 근하신년 광고를 게재하면서 광고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동화약방 광고의 특징은 활명수나 인소환, 백응고 같은 주요 제품에 대해서만 알린 것이 아니라 기업의 창업정신과 특약점의 관리규정 등을 담은 규례를 함께 게재했다는 점이다.……또한 일찍부터 기업 사회공헌 활동에도 관심을 보여 1915년 8월에는 민강 초대 사장이 설립에 참여하고 교장으로 재직하기도 한 사립 소의학교 (昭義學校)에 이익금 전액을 기부하겠다는 내용으로 경품 없는 경품부 (景品付) 광고를 시행하기도 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업 사회공헌 활동으로 기록될 만한 일이다. ---pp.40~41

2장_현명한 경영자가 기업의 ‘활명수’다
독립투사이자 교육자로도 훌륭한 업적을 남긴 민강 사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동화약방. 민족주의 사상이 투철한 민족 기업인 보당 윤창식 사장이 동화를 인수하면서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윤창식, 민중의 활명수를 살리다
민씨 문중에게 동화약방의 인수를 제의받은 보당 윤창식은 신중한 그의 평소 성격대로 심사숙고에 들어갔다. 당시 보당은 여러 사업의 연이은 성공으로 동화약방을 인수할 만한 재력은 충분히 갖췄으나 제약업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 그를 망설이게 한 큰 이유였다. 그러나 그는 동화약방이 민족 기업으로서 국민 건강에 크게 이바지하고 소의학교에 기부하는 등 사회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민강 사장의 독립운동에 대해서도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동화를 회생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공감했다. …… 장고 끝에 그는 생명을 살리는 좋은 약을 만들어 민중에 봉사하겠다는 일념으로 동화약방의 인수를 결심하게 된다. 보당은 동화약방의 회생에 뜻을 같이하는 최병하 (崔炳夏)와 합작으로 후한 가격에 회사를 인수한 뒤 1937년 2월 26일 제5대 사장으로 취임했다. ---pp.69~70

3장_시대를 앞서는 경영은 파격과 함께 온다
사장 취임 후 회사의 구조조정을 마치고 국내 영업망을 재정비해 새로운 도약을 도모하던 윤창식 사장은 국내시장의 성장이 한계에 달하자 발 빠르게 만주로 눈을 돌렸다. 동화의 만주 진출은 현지 공장까지 건설해 동북3성의 상권을 본격적으로 공략했다는 점에서 우리 기업의 모범적인 초창기 해외 진출 사례로 기록될 만하다.

필요하다면 파격 인사도 불사하라
윤창식 사장이 만주 진출의 교두보로 지목한 곳은 안동이었다. 1938년 12월 동화약방은 안동시 (安東市) 금탕구 (金湯區) 하천단정 (下川端町) 25호에 지점을 개설했다. 안동지점의 지점장은 여성인 장금산 (張金山) 약사가 관리약사를 겸해 맡았다. 장금산 지점장은 조선약학교 본과 7회 졸업생으로 일찍이 이화여전 영문과에 다니다 중퇴하고 약사의 길을 택할 정도로 매우 진취적인 신여성이었다.
당시 사회 분위기를 미뤄볼 때 여성을 지점장, 그것도 처음으로 진출하는 해외의 지점장으로 임명한다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였다. 장금산 지점장은 지점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동화의 만주 진출에 큰 공을 남겼으며 그 후 현지 공장이 건립된 뒤에도 책임관리약사로서 1945년 종전으로 모든 인력이 철수할 때까지 그곳에서 근무했다. 또한 광복 후에는 국내 여성 약사 1호로서 여약사회 발전에 커다란 공로를 남기기도 했다. ---p.83

4장_숱한 담금질이 강력한 브랜드를 만든다
윤창식 사장은 광복 직후 정국이 혼란스럽고 경? 여건이 어려워지자 심사숙고 끝에 회사를 개점휴업 상태로 유지한 채 건국운동에 투신한다. 3년 뒤 성공적으로 회사를 재건한 것도 잠시 6?25 전쟁으로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하지만 피난지 마산에서 재기에 성공해 서울로 귀환한 1955년에는 매출 857만 환과 당기순이익 190만 환이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이뤄냈다.

나라가 살아야 기업이 산다
동화는 만주와 북한의 생산설비와 시장을 잃었다고는 하나 본사 공장은 건재했고 원료도 2년 치는 확보하고 있어 다른 제약업체들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민족주의자인 윤 사장으로서는 나라의 형편이 백척간두에 서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개인적인 사업에 매달려 있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는 정국이 안정되고 해방된 조국이 나라의 모습을 제대로 갖출 때까지 당분간 동화를 개점휴업 상태로 유지할 것을 결심한다.
사업은 휴면 상태로 들어갔으나 윤 사장은 종업원들에게 보수를 꼬박꼬박 지급했다. 항상 “동화는 동화 식구 전체의 것”임을 강조하고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기업”을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있던 그로서는 회사가 휴면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종업원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기업 활동을 일시적으로 멈춘 윤 사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활동에 들어간다. ---pp.96~97

‘역전의 명수’ 활명수 아류 제품을 제압하다
동화가 휴면에 들어가 있는 동안 의약품시장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특히 활명수가 오랫동안 석권하고 있던 액제 소화제 시장에 그사이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했다. 그것은 동아제약사의 생명수였다. 상표명도 활명수와 흡사한 생명수가 동화가 어지러운 세상을 관망하며 칩거하고 있는 틈을 타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동화로서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반세기 이상을 쌓아온 명성이 도전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지만 동화는 거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윤창식 사장의 지휘 아래 전 사원이 일치단결해 생산 활동을 정상화하고 영업에서 활기를 되찾으면서 서서히 고토를 회복하기 시작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옛 아성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활명수의 브랜드 파워는 역시 막강했다. ---p.103

5장_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꼿꼿한 소신 경영
서울로 돌아온 뒤 전쟁의 후유증으로 여러 가지 여건이 어려웠음에도 동화의 성장은 순조로웠다. 상경 후 7년간 매출 성장 약 32.7배, 당기순이익은 약 18.6배에 이르렀다. 1962년 동화는 사명을 동화약품공업주식회사로 변경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사명 변경은 세상의 변화를 예견한 윤창식 사장의 마지막 작품으로, 그는 다음해인 1963년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윤 재투자로 외국 자본을 거부하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윤창식 사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원조자금의 분배 과정에서 갈등과 반목이 생기는 것을 보고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외국 자본에 의존해 기업을 재건하는 것은 민족 기업인 동화가 나아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동화의 몇몇 간부 사원들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동화야말로 ICA 자금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주장하자 “민족 기업의 긍지는 순수 민족자본으로 재건될 때만 지킬 수 있다.”고 역설하며 가로막았다. 일제의 혹독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버텨온 동화인데 이제 와서 외국 자본에 기댈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윤 사장은 그때부터 이윤을 완전히 재투자하는 방식으로 회사를 재건해나갔다. ---p.119

철학과 소신의 CEO 윤창식이 남긴 것
직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윤 사장은 겨울이면 월동 준비를 못하는 직원들을 위해 장에 나가 땔감용 나무를 직접 골라 나눠줄 정도로 자상한 인품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는 명절에 답지하는 선물도 결코 개인적으로 갖는 법이 없었고 회사에 모아뒀다가 전 직원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다. 회사에 들어온 선물을 나눠 갖는 관습은 이때부터 동화의 전통이 돼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요즘은 회사에 들어오는 모든 선물을 총무부에서 모아두었다가 회장 이하 전 임직원이 추첨으로 나눠 갖는 제도로 정착됐다.
인재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그는 사람과 한번 인연을 맺으면 중도에 헤어지는 법이 없었다. 동화 중흥의 초창기에 그와 인연을 맺었던 대부분의 인사가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동화와 운명을 같이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해준다. 남기준 공장장 같은 이는 동화에서 무려 54년을 근속했으며 공장장으로만 30년을 근무했다. 그 외에도 광복 후 경영 실무를 총괄하는 지배인으로 활약했던 남상갑이나 관리약사였으며 훗날 감사를 역임한 한기엽 같은 이들을 비롯해서 30~40년을 근속한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인재 제일주의는 항상 그의 경영철학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자취를 남긴 보당 윤창식 사장이 동화 전 가족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pp.127~128

6장_새로운 싸움에서는 지난 판을 잊어라
윤화열 사장, 윤광렬 상무 등 얽식교육을 받은 2세들이 경영일선에 등장하자 동화는 진취적인 경영 방식을 택하기 시작한다. 몇 년간 성장 시대를 구가하던 동화는 의외의 복병을 맞아 위기에 처하는데, 탄산가스를 주입한 까스명수가 등장한 것이다. 그러자 동화는 까스활명수를 개발해 싸움의 판을 새로 짠다. 탄산 대 비탄산의 경쟁에서 탄산 소화제끼리의 경쟁으로 구도를 바꿔 결국 브랜드 자산가치가 높은 까스활명수가 유리해지도록 한 것이다.

트렌드의 산물 ‘까스활명수’ 탄생
까스활명수의 발매로 시장의 경쟁 구도는 활명수와 까스명수의 싸움에서 순식간에 까스활명수와 까스명수의 대결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탄산 대 비탄산이 아니라 같은 탄산 소화제끼리의 경쟁 구도로 바꿔놓은 것이다. 같은 탄산끼리의 대결이라면 이제 싸움은 제품 종류 간의 싸움이 아니라 브랜드의 싸움으로 전환되고, 그렇게 되면 브랜드 자산가치가 높은 까스활명수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전략이 주효해 까스활명수는 곧 승기를 굳혀 까스명수에 잠식당했던 시장을 회복하게 된다.
활명수가 그때 막 유행하기 시작한 발포성 소화제의 트렌드에 편성한 것은 참으로 현명한 결정이었다. 까스활명수의 발매는 소화제시장 확대에 기여해 동화에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다. ---p.143

소비자를 감동시킨 활명수의 쾌거
1967년 3월 30일 활명수는 매일경제신문사가 주최하고 소비자들이 투표로 선정하는 제1회 봉황대상 시상식에서 대상을 받았다. 봉황대상은 매일경제신문사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 개념인 ‘소비자 보호’를 기치로 내걸고 시민운동 차원에서 제정한 상이었다. 그런 상의 제1회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것은 활명수나 동화에 큰 영광이자 보람이 아닐 수 없었다.
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활명수는 한약이 갖는 약효와 양약이 갖는 사용상의 장점을 고루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쌀과 같은 곡류를 주식으로 해서 위 확장에 걸리기 쉬운 우리나라 사람의 체질에 맞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한 활명수는 위에 들어간 음식물을 직접 소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위 신경을 자극해 정지 상태에 있는 위를 다시 활동하게 하므로 일반적인 소화불량뿐 아니라 애주가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도 선정 이유였다. 이는 활명수가 술에 상하기 쉬운 위를 보호해주고 이를 술에 타서 마시면 약효뿐 아니라 그 맛 또한 일미를 더해주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pp.149~150

7장_회사와 같은 꿈을 꾸는 종업원은 고속성장의 동력
1973년 윤광렬 상무가 제7대 사장으로 선임됐다. 윤 사장은 선대 윤창식 사장의 “동화는 동화 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서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라는 경영철학을 토대로 전 종업원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경영의 기본 방침을 정하고 우리사주조합과 생산직 전 사원 월급제 등을 실시해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병을 고쳐 생명을 살리는 활명수의 사회공헌
윤광렬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희귀약품센터와 중앙연구소 설립에 심혈을 기울인다. 그는 평소 “살상하는 약보다는 병을 고쳐 생명을 살리는 약을 만들라.”는 뜻을 남긴 선친 윤창식 사장의 생명 존중 사상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를 고심하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희귀 약품 공급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희귀 질환을 치료할 희귀 약품을 구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희귀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치료약을 구하지 못해 고통을 당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사실 ‘희귀약품센터’는 그전부터 정부와 의학협회가 설립을 검토해왔으나 이윤 확보가 어렵다는 점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의약품 수입상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지 못해 성사가 어려워지면서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약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 무렵 동화가 희귀약품센터의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pp.185~187

노사화합의 다리가 되는 우리사조조합
기업공개에 앞서 윤광렬 회장은 종업원들에게 회사 주식을 소유하게 해 재산을 형성할 기회를 부여하고 주인의식을 심어주고자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할 방침을 세웠다. 윤 회장은 동화가 기업윤리에 투철한 모범적인 회사가 되려면 은행이나 투자신탁회사, 혹은 불로소득으로 번 돈을 투자한 주주들이 아닌, 진정으로 회사를 위해 일해온 종업원들에게 회사 주식을 소유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윤 회장의 뜻에 따라 동화는 1976년 2월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하고 종업원지주제를 실시했다. 주주가 되기를 희망하는 종업원에게 주식을 분배함으로써 1976년 3월 12일 주주 수는 4,971명으로 늘어났다. ---p.195

국내 최초의 생산직 전 사원 월급제
동화는 1978년 4월 우리나라 최초로 생산직 사원들의 시간제 급료제도를 폐지하고 월급제로 급여 체제를 변경했다. 이는 사무직과 생산직 근로자 사이의 차별에 따른 문제점을 해소하고 모든 종업원을 동등하게 대우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동화가 실시한 생산직 근로자의 완전 월급제는 국내 유수 기업들은 물론 노동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킬 정도로 파장이 컸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 사정에서 완전 월급제는 시기상조라는 말이 많았다. 그러나 윤광렬 회장은 ‘동화는 모두 한 식구’라는 신념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윤 회장은 몇 년 전 공장을 방문했을 때 한 여종업원이 “월급 한번 받아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한 말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있었다. 그때 받은 충격이 그에게 생산직 사원들의 완전 월급제를 추진하게 한 동인이 된 것이었다. ---p.197

8장_변화를 예견하는 자의 위기는 기회다
1990년대에 들어선 동화는 제약업계의 선두 그룹으로 발돋움한다. 그 원동력은 활명수 제품군을 비롯해 헬민, 알프스디, 홈키파, 후시딘 같은 효자 상품들이 거대 품목으로 성장했기 때문이다. 112년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동화의 현재 상태는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지금처럼 정체가 10년 넘도록 계속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활명수는 어떤 역할로 동화의 위기 탈출을 도와야 할까?

역사적인 창립 100주년과 IMF
1997년 9월 25일 동화는 창립 100주년을 맞이했다. 대한제국 원년인 1897년 9월 25일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인 활명수와 함께 출발한 동화약품이 역사적인 창업 100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동화의 100년 역사는 한국의 근세사이자 기업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화는 일제 강점기 시대부터 8?15 광복, 6?25 전쟁, 4?19 혁명, 5?16 군사정변 등 우리 사회가 겪어온 모든 사건을 국민과 함께 겪으며 성장해온 것이다. 활명수는 그런 과정에서 소비자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명실공히 국민 소화제로 커왔다. 세계적으로 하나의 제품이 한 세기가 넘도록 소비자의 사랑을 받아온 예는 손으로 꼽을 정도다. 그 유명한 아스피린도 활명수보다 2년 뒤에 세상에 나왔다. ---pp.254~255

9장_진화하는 장수 제품의 변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어라
활명수는 놀라운 생명력으로 한 세기가 넘도록 동화의 효자 상품 역할을 충실히 해왔다. 그러나 과거의 실적이 좋았다고 해서 미래의 성적이 보장된다는 법은 없다. 이제 동화는 국내 최장수 제품의 위상 유지는 물론 정체에 빠져 있는 동화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활명수의 수명 연장을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활명수의 브랜드 자산가치를 극대화하라
활명수가 112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정상의 자리를 지켜왔다는 것은 경이로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연구와 개발 속도가 어느 분야보다도 빠른 의약품 분야에서 신제품이 몇 번 나왔다고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성분이 같은 제품으로 한 세기를 넘게 버텨온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가까스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성장 기조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까스활명수-큐가 활명수 제품군 매출의 대종을 이루고 있지만 소비자에게는 아직도 옛 이름인 활명수가 더 익숙하다는 사실이 그 입지를 말해준다. ---p.271

제품이 아닌 브랜드 이미지를 팔아라
“코카콜라는 단순히 음료를 만드는 회사가 아닙니다. 브랜드 이미지를 파는 회사입니다.”라는 그들의 주장은 장수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코카콜라의 이런 성공적인 변신과 브랜드 마케팅 사례는 비슷한 역사와 배경을 가진 활명수의 향후 행보에 여러 가지 시사점을 제공한다. 지금 동화는 장기적인 정체기에 놓여 있다. 돌이켜보면 활명수의 역할은 동화가 어려울 때마다 더욱 빛이 났다. 이제 활명수는 다시 한 번 동화의 재도약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해내야 한다. 112년 동안 쌓인 위기 극복 노하우와 모든 역량을 동원해 활명수는 현재 동화를 가로막고 있는 난관을 돌파하고 나아가서 새로운 100년의 역사를 창조해야 한다.
활명수의 100년 후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일지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pp.280~281

10장_역사 속 리더에게 활명수의 길을 묻다
활명수와 동화의 112년 역사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은 초대 민강 사장과 5대 윤창식 사장이다. 민강 사장은 활명수를 만든 인물이며, 윤창식 사장은 쓰러져가던 동화를 인수해 활명수를 살리고 키워놓은 은인이다.

동화의 기업문화를 확립한 윤창식
윤창식 사장은 생명 존중 사상을 갖고 있어 늘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마라. 살상하는 약보다는 병을 고쳐 생명을 살리는 약을 만들라.”고 했다. 또한 “동화는 동화 식구 전체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라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었다. 그의 이런 뜻은 동화의 기업문화와 전통으로 자리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예를 들어 1976년 살충제 ‘홈키파’를 개발할 때 사내에 “보당의 뜻을 이어 생명을 살리는 약을 만들어야지 생명을 죽이는 약을 만들어서 되겠느냐.”는 논란이 있어 한동안 제품 개발이 중?될 정도였다. 상당한 논의 끝에 인체에 유해한 벌레를 잡는 것은 간접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길이라는 결론이 나서 마침내 생산을 시작했지만 제품명을 경쟁제품과는 달리 방어적인 인상을 주는 ‘홈키파’로 정한 것도 윤창식 사장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된 동화의 기업문화를 웅변으로 말해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pp.295~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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