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외국어 대학교와 대학원, 스페인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스페인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스페인 어로 된 좋은 책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옮긴 책으로는 ≪숲은 나무를 기억해요≫, ≪아버지의 그림편지≫, ≪어느 날 훌쩍 커버린 아이 후후≫, ≪카프카와 인형의 여행≫, ≪강 너머 저쪽에는≫ 등이 있습니다.
당근은 죽을 때까지 나와 비밀 결사대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맹세를 더 확실히 하려면, 협정서에 피로 서명을 해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깨진 맥주병 조각을 주워서 당근에게 주고 찌르라고 했다. 그러나 당근은 싫다고 하면서 나에게 병 조각을 다시 주었다. 내 비밀이니까 내가 먼저 찔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나에게 명령을 해 대는 당근에게 짜증 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근은 바보 같은 앵무새처럼 피로 맹세하지 않은 비밀은 효력이 없다고 계속 이야기했다. 왜냐하면, 피가 없으면 비밀은 중요하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은 비밀은 아무 때나 달아나 버린다는 것이다. 마침내 나는 당근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나는 맥주병 조각을 집어 들고 손가락을 그었다. 손가락에서 피가 났다. 그걸 본 당근은 속이 울렁거린다고 했다. 당근은 훌륭한 동지다. 그러나 참을성이 없다. 겁쟁이 당근은 예방 주사를 맞지 않았다고 핑계를 대며 달아났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학교에서 함께 예방 주사를 맞아 놓고 말이다.
방향을 잃고 잘못 날아온 공이 소냐 언니의 머리에 떨어졌는데, 소냐 언니가 가만히 있었다. 정말이다. 소냐 언니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공이 날아온 길을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좇았다. 그러다 금발의 앞머리가 늘어져 있고, 멋진 문신을 하고 나무 라켓을 들고 있는 소년을 발견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가 범인이었다. 그는 독일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독일인들은 언제나 화가 난 사람처럼 자음을 삼키면서 킁킁거리며 말을 했다. 그런데 이 소년이 화난 사람처럼 킁킁킁 말을 하면서 소냐 언니에게 다가왔다. 나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당근도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두 금발에 앞머리를 늘어뜨린 가엾은 독일 소년을 기다리는 끔찍한 일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우리 모두 소냐 언니를 알고 있다. 그래서 최소한 라켓과 공을 빼앗고 문신을 잡아 뜯고 앞머리를 하나하나 뽑아 버릴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에 소냐 언니는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 기적이었다. 독일 소년이 킁킁거리며 뭐라고 떠들고, 소냐 언니는 얼굴이 빨개져서 입을 다물었다. 햇빛을 하나도 받지 못한 새우 색깔의 외국인처럼 그렇게 얼굴이 빨개졌다. 나의 동지인 당근이 소냐 언니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말했다. “마음에 드나 봐.” “공으로 머리를 때린 인간이 마음에 든다고?” “저 외국인이 마음에 드는 거야.”
바닷가에서 우리는 작업에 들어갔다. “안녕! 내 언니의 남자 친구가 되어 주지 않을래요?” 소년이 신기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그 기회를 놓칠세라 소냐 언니의 사진이 있는 복사지를 손에 쥐어 주었다. “이름은 소냐고 아주 착해요. 뒤에는 주소가 있어요.” 나는 반쯤 돌아섰다. 소년이 사진을 보며 주소를 읽고 있었다. 모두 낚였다. 모두 사진을 바라보았다. 소냐 언니는 매력적이었다. 광고지를 돌리는 것 같았다. 아무도 나에게 사진을 돌려주지 않았고 휴지통에 버려진 사진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내일이면 소냐 언니 사진으로 샌드위치를 싸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사진은 보았을 거다. 나는 천만 번쯤 그 일을 했을 거다. 처음에는 소냐 언니 마음에 들 만한 소년들만 찾아 골랐다. 앞머리를 내리고 문신을 한 소년들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나는 닥치는 대로 뿌렸다. 결국 마을 모든 사람이 소냐 언니의 사진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