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아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정상이 아니에요.”
가을이 깊어 가던 어느 날 중년의 부부가 상담실을 찾아왔다. 그들은 정말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내게 하소연했다.
“우리 집은 늘 정리 정돈이 잘되어 있답니다. 두 아들이 있는데 어려서부터 둘째는 제가 하자는 대로 잘 따라왔어요. 그런데 첫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요. 방도 엉망이고 평소 지각도 잘하고… 그 때문에 난리 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저와 첫째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남편까지 끼어들어 집안이 시끄러워져요. 전 정말 이 아이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뭘 시켜도 안심이 안 되고 불안해요.”
“그것 때문에 첫째는 정상이 아닌가 싶은가요?”
“정상이라면 저를 이렇게까지 미치게 하겠어요? 한번은 버릇을 고쳐 보겠다고 며칠 동안 방을 치워 보지 않았어요. 그랬더니 정말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 됐죠.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방 좀 치우라고 잔소리했더니 얘가 글쎄, 자기는 그 방이 너무 좋다는 거예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더라고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지저분한 방이 좋다는 거죠? 일부러 절 약 올리려고 그러는 거 맞죠?”
들어 보니 이 집의 가족 구성원 중 세 사람은 성향도 비슷하고 행동 패턴도 비슷한데 첫째만 아주 달랐다. 세 사람은 일 중심적이고 성실하고 규칙적인 데 반해, 첫째는 느긋하고 인간 중심적이고 느낌이 중요한 개성 강한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첫째는 이제 사춘기의 절정을 달리는 중3이었다!
부모는 자기들과 성향이 너무나 다른 첫째를 이해할 수 없어서 얼굴만 보면 잔소리하기 바빴고, 사춘기의 절정을 지나는 첫째는 그런 부모와 대립하면서 천덕꾸러기가 되고 있었다. 부모는 형편이 어려워 힘들게 아르바이트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음에도 특별한 갈등 없이 사춘기를 지냈다. 더구나 지금까지 모범생의 범주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 그들로서는 부모의 보살핌을 받아 넉넉하게 자라면서도 번번이 부모와 대립하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정상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과연 그럴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다. 한 명 한 명이 다 절절하고 순간순간이 다 애달프고 소중하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 10대의 자녀를 키우고 있다면 아마도 “아픈 손가락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손가락 하나하나가 다 뭉그러지고 고름이 잡혀 있어요” 할지도 모른다.
자녀를 키우면서 “나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를 회피하거나 부인하거나 혹은 잘 몰라서 제대로 지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당연히 행복하고 희망적이고 고무적일 때가 많지만 그와 비례해서 고민도 깊고 갈등도 크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나 역시 사춘기 자녀를 키운 부모로서 ‘아, 나는 정말 애들을 잘 키웠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사람들은 내가 자녀 교육을 강의하고 그와 관련한 상담을 하는 사람이니 자녀를 훌륭하게 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기대한다. 하지만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막내아들에게 “엄마가 사춘기 아이들을 위한 책을 만들 건데, 너의 사춘기 때 엄마는 어땠니?” 하고 물어보았을 때 아들의 입에선 기대하던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기대한 답은 “엄만 정말 좋은 엄마였어”이지만 아들의 대답은 “엄마가 노력한 건 알겠는데… 늘 한 발짝씩 늦었지. 나도 사춘기를 지나며 좀 힘들었고…”였다. 그나마 “하지만 그런대로 잘 큰 것 같아” 해 줘서 다행이었다.
그렇다.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특히 그 자녀가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면, 정말 어렵고 힘들다. 부모는 나름대로 배려한다고 하지만, 자녀는 배려로 생각하기 힘들 수도 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녀의 사춘기는 겨울이라 할 수 있다. 요즘 사춘기는 이르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시작되는 것 같다. 그러다 중학생을 지나며 절정을 이룬다.
겨울에는 아무리 씨앗을 심어도 싹이 나기 어렵다. 봄에는 씨앗을 심으면 여름을 지나 30배 60배의 소출을 기대할 수 있지만 겨울에는 본전도 찾기 힘들다. 심지어 쭉정이만 무성할 수 있다. 겨울이 되어서야 부랴부랴 씨앗을 심어 봤자 본전도 찾기 힘들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봄철에 미리미리 씨앗을 심어 두어야 한다. 자녀와의 관계를 철을 따라 농사짓듯이 한다면 겨울을 나기가 수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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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아이들을 보면 마치 갓난아기처럼 굴 때가 많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모를 가르치려 들고 별 볼일 없는 것에 목을 맨다. 참자기가 출현하면서 전능하고 과대한 자기가 올라오는 것이다. 이때 어떤 부모는 “이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 이것도 못하고 저것도 못했잖아” 하며 아이의 기를 죽인다. 그러면 사춘기 때 어렵게 올라온 참자기가 다시 한 번 좌절하게 된다.
부모는 사춘기 자녀에게 참자기가 제대로 발달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설령 사춘기 자녀가 부모에게 이래라, 저래라, 콩 놔라, 팥 놔라 하며 가르치려 하고, 말도 안 되는 말로 우기고 잘난 체하더라도 부모는 그런 자녀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해선 안 된다. “그래? 너는 그렇게 생각하니?”, “역시 네가 말한 대로 했더니 잘되는구나” 하고 응대해 줄 때 아이의 참자기가 발현될 수 있다.
사실 부모가 자녀의 어처구니없는 태도를 격려하기는 쉽지 않다. 부모 자신이 건강하고 자존감이 있을 때 이런 격려를 할 수 있다.
심리치료 중에 놀이치료가 있다. 놀이치료를 잘하는 선생님은 아이와 게임을 하면서 아이가 눈치 채지 못하게 일부러 져 준다. 아이의 자존감을 높여 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게임에서 이기기는 쉬워도 져 주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내가 져 줬다는 것을 상대가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란 더 어렵다. 어떤 아빠는 자녀와 게임하면서 절대 져 주지 않는다. 끝까지 이기려고 든다.
언젠가 상담하러 온 대학생의 아버지는 명문대 교수로 바둑을 잘 두신다고 했다. 이 대학생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와 바둑을 곧잘 두었는데 지금까지 한 번도 아버지를 이긴 적이 없다고 했다. 심지어 아들이 이기고 있는데 아버지가 한 수 물러 달라고 해서 기필코 아들을 이겼고, 아들이 한 수 물러 주지 않으면 바둑판을 엎어 버려서 승패를 가르지 못하게 했다. 그 학생은 참자기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사춘기 아이들은 게임에서 지는 걸 자존심 상해 한다. 설령 상대가 부모나 가족이어도 게임에서 지는 건 못 견뎌 한다. 승부욕이 너무 강해 게임에서 지면 폭력적으로 변하는 아이들도 있다. 어른의 시각에서 보면 사춘기 아이들의 승부욕이나 하는 짓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말싸움에서도 지고 싶지 않아 끝까지 우기고, 그러다 안 되면 집이 더럽다느니 음식이 맛이 없다느니 생트집을 잡아 마음이라도 상하게 하고 싶어 한다.
참자기를 좋게 말하면 창의력과 돌파할 수 있는 저력이라고 할 수 있고, 달리 말하면 일탈 충동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지내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참자기는 자녀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렵다. 그때 부모는 아이와 경쟁해서는 안 된다. 참자기가 출현하면 스스로 매우 위대해 보이고 자신만 옳아 보이고 잘나 보인다. 이때 부모가 자녀와 경쟁하면서 져 주지 않고 자녀의 말을 받아 주지 못하면 자녀의 참자기는 다시 숨게 된다.
서양 속담에 “사춘기를 사춘기 때 겪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시 온다. 죽을 때까지 오지 않으면 관 속에서라도 온다”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사춘기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는 의미다. 자녀가 사춘기에 있다면 참자기를 활성화시켜 만족감을 주는 것이 부모가 할 일이다. 이렇게 만족감이 충족되면 참자기는 다시 쏙 들어간다. 부모는 그때까지 이해하며 기다려 주어야 한다.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럼에도 변함없이 아이를 수용하는 환경, 안아 주는 환경을 제공할 때 아이는 홀로 서는 존재로 성장한다. 작은 존재로서도 견딜 수 있고 실패도 견디고 성공도 잘 견디며 인생의 방황도 견뎌 낼 수 있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
부모가 아이에게 안아 주는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면 아이는 자신이 산산이 부서지는 느낌, 자살 충동, 자해, 방향 감각을 상실한 느낌, 외로움 등을 견딜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한다.
---pp.47~49
‘과연 사춘기 자녀와 친해질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먼저 부모가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사춘기 때 천방지축으로 자란 부모가 의외로 사춘기 아이들과 잘 지내는 경우를 심심찮게 본다. 이런 부모는 웬만해선 겁먹지 않는다. 어차피 어릴 때 다 해본 일이기 때문에 이해가 잘되는 것이다.
이렇듯 내 안에 억압되어 발현되지 못한 부분이 자칫 내 자녀에게 좋지 못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봐야 한다. 사춘기 시절 내 심정은 어땠고 내가 바랐던 것은 무엇이었나?
이런 경우도 있다. 한 엄마가 상담을 받으러 왔는데, 이 엄마는 자녀를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 아이는 부족한 것이 없다. 내가 만일 어려서 지금의 나와 같은 엄마가 내 부모였다면 나는 정말 행복했을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아낌없이 베풀어 줬는데 아이가 왜 엇나가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이 엄마는 어릴 때 부모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부모는 자신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았고, 가르쳐 주지도 않은 채 방치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은 절대로 내 자녀를 방치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결국 이 엄마는 자녀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해주는 엄마가 되었다. 옷 입는 것, 양말 신는 것, 신발 신는 것, 숙제 준비물까지 다 챙겨 줬다. 자녀는 어땠을까? 아이는 이런 엄마 때문에 숨통이 조여 오는 갑갑함을 느꼈다. 집에 들어오는 것도 싫어서 밖으로 뛰쳐나가기 일쑤였고, 엄마는 그런 아이를 잡으러 다녔다.
부모로서 나는 어린 시절 무엇이 넘쳤고 무엇이 부족했는가? 그때 나는 세상을 어떤 눈으로 보았고 부모를 어떻게 느꼈는가? 내가 한 강력한 요구가 무엇이었고 무엇에 상처를 입었는가? 좋은 부모를 머리로만 알아선 곤란하다. 부모가 사춘기 때 너무 결핍된 것도 좋지 않지만 너무 과잉된 것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수도 없이 하며 스스로를 알아 가야 한다.
지금 나는 부모로서 어디쯤 서 있는가?
---pp. 52~54